[me] 치매 노인과 젊은 여성‘영혼의 동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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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가와세 나오미 감독. [중앙포토]

영화 이야기를 물색없이 시작한다. 숫자 ‘33’이다. 불교에서 ‘33’은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33천(天)’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도리천을 가리킨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우리 인간세계, 즉 온 세상을 뜻하곤 한다.

매년 새해를 여는 보신각 타종도 33번이다. 1년 내내 국가가 편안하고 모든 중생이 구제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불국사의 명물인 청운교·백운교의 계단도 33개다. 속세의 욕심을 씻어내고 천계(天界)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일본영화 ‘너를 보내는 숲’에서도 ‘33’은 각별하다. 영화에서 이 숫자가 유달리 부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 시게키(우다 시게키)가 사랑하던 아내를 잃은 게 33년 전이요, 또 그가 힘겹게 찾아간 아내의 무덤 앞에 바치는 게 33년간 써왔던 일기다.

시게키가 머물던 요양원의 동료 노인들도 ‘33’을 언급한다. 그들은 죽은 지 33년이 된 시게키의 아내를 두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갔을 겁니다”라며 시게키를 위로한다. 일본불교에서는 33주기 기일이 되면 죽은 이가 이승을 완전히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다고 한다.

군더더기가 좀 길었다. ‘33’의 속뜻을 몰라도 ‘너를 보내는 숲’을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되레 영화를 어렵게, 혹은 복잡하게 만든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처럼 양념을 적게 친, 담백한 작품도 많지 않은데 말이다. 관객에 따라 밍밍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다.

영화의 얼개는 간단하다. 무대는 한적한 농촌의 노인 요양원. 주름살 가득하고, 이빨 빠진 노인들이 삶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언뜻 ‘노인냄새’ 가득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은 산뜻·깔끔하다. 어린 아들을 잃고 노인을 돌보는 간병인 마치코(오노 마치코)와 시게키가 주요 인물이다.

전반부는 제법 정적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초록빛 가득한 논, 햇살 비치는 숲,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로 시작 5분여를 채운다. 카메라도 저 멀리에 떨어져서 자연과 그 안의 ‘작은’ 사람들을 잡을 뿐이다. 별다른 기교나 액션이 없다. 중반 이후 메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아내의 무덤을 찾아나선 시게키와 그를 동행하는 마치코 사이에서 소통과 교감이 이뤄진다. 각자 남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온 그들이 숲 속을 헤매는 과정에서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고,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찾게 된다. 중반 이후는 일종의 로드 무비를 닮았다. 좁은 산길에서 방향을 잃은 그들이 목적지에 한발한발 가까워지며 그간 미뤄두었던 망자와의 ‘참된 이별’에 다다른다.

동병상련이랄까.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그들은 가슴 깊숙이 꼭꼭 묻어두었던 슬픔을 토해내며 영혼의 교감을 느낀다. 감독은 이런 정화 과정을 시적인 영상으로 풀어낸다. 결코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메인 캐릭터가 그들을 둘러싼 숲과 나무, 물과 바람 등 자연이 아닐까 싶을 만큼 차분하고, 나직하게 작품을 끌고 간다. 젊은 여인과 반백의 노인이 짙푸른 차 밭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서로 수박을 먹여주며 갈증을 달래거나, 체온을 함께 나누며 한밤의 추위를 이겨내는 등의 정겹고 유머러스한 장면도 끼워 넣었다.

감독 가와세 나오미는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 여성 감독이다. 이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2등상)을 받았다.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친척 할머니 밑에서 자랐던 그의 체험담도 일정 부분 담겨 있다. 감독은 “사람은 자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 힘들다. 타인이 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말한다. ‘너를 보내는 숲’은 바로 그런 영화다. 상처를 치유하는 영화의 힘을 보여준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도 던져준다.

원제는 ‘모가리의 숲(殯の森’). ‘모가리’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공간을 가리킨다. 24일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 광화문 시네큐브, 강변 CGV, 메가박스 코엑스 개봉. 전체 관람가. 

박정호 기자


가와세 감독 한국 특별전

‘너를 보내는 숲’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작품 가운데 한국에서 개봉하는 첫 영화다. 그의 영화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전도 준비됐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8㎜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 ‘따뜻한 포옹’(1992)부터 ‘너를 보내는 숲’까지 총 10편이 상영된다. 인간의 상실감과 소통을 줄곧 담아온 감독의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서울 하이퍼텍 나다(27일까지), 대전 아트시네마(5월 8~13일), 서울 상상마당(5월 15~21일), 광주 광주극장(5월 23~29일), 대구 동성아트홀(5월 30일~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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