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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제2부 수로부인(水路夫人)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 46 사랑하는 일과 아이 낳는 일.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이 두가지 일에 아리영은 실패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실패다.
곱드러진 원인이야 어디 있든지 간에 앞으로는 정직하게 살고 싶었다.우선 이혼하고,그 후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마음을 다졌다. 나선생이 보내준 『의심방』을 책장 안에 챙겨 넣었다.
모처럼 보내준 책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
서른가지나 되는 소상한 성애(性愛) 체위(體位)며 기법이며,아이 갖는 법이며 아이 갖고나서 섭생하는 법이며….하늘을 봐야별을 딴다고 하지 않았는가.
『며칠째 웬 대청소냐?』 바깥 일을 보고 돌아온 아버지가 아리영의 수고를 위로했다.
『더위도 한물 갔으니 깔끔히 가을맞이를 해야지요.올해엔 추석도 빨리 들었어요.』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어머니가 살아있으면 분명히 커튼갈이까지 했을 것이고,이리저리 가구도 옮겨 가을분위기도 냈을 테지만 아리영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안을 예쁘게 꾸민다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 「애정의 표현」이나 같다.누구를 향하여 애정을 표현한단 말인가.
『오늘 저녁식사는 이 깨끗한 마당에서 하는 것이 어때?』 아리영의 마음을 돋우 듯이 아버지가 제의했다.
합환화(合歡花)가 꿈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는 초여름 저녁이면 어머니는 이따금 조촐한 가든파티를 가졌다.자귀나무 아래에다 야외용 테이블 세트를 놓고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원유회(園遊會)엔 반드시 음악도 따랐다.주로 피아노 협주곡이나 우리나라 가곡의 테이프를 틀었다.
어머니가 특별히 즐겨 들은 것은 김성태(金聖泰)작곡의 노래들이었다.『동심초』라거나 『산유화』라거나 『이별의 노래』….맑은애수(哀愁)의 바닥을 비추는 지성(知性)에 끌린다고 했다.
어머니가 하던 대로 했다.
야외용 테이블 위에 인도인의 터번같은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를펴고 차게 식힌 백포도주와 간단한 안주를 차렸다.
음악도 틀었다.김성태 작곡,박목월 작사의 『이별의 노래』.가슴깊이 잦아드는 애틋한 가곡이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고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리영은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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