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인들 스페인서 한국문학 알리기 행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 포도주 한 모금에 ‘만인보’ 한 편씩을 읊은 고은 시인의 정열적인 모습이 스페인 청중을 사로잡았다.

▶ 소설가 신경숙(맨 왼쪽)씨가 낭독하는 모습을 진행을 맡은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운데)가 지켜보고 있다.

시인 고은(71)씨와 소설가 임철우(50).신경숙(41)씨 등 한국의 문인들이 스페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를 16일(현지시간) 마드리드에서 열었다. 행사는 문학세미나와 시 낭송회 순서로 이어졌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 지원을 받아 고씨의 '만인보' 시선집과 임씨의 '동행', 신씨의 '그 여자의 이미지' 등 작가 10명의 단편 10편을 모은 '한국현대단편선'이 이번주 스페인에서 출간된 것과 때를 맞추어 준비한 이벤트였다.

특히 오후에 고씨의 시 낭송회가 열린 종합 문예공간 '시르쿨로 데 베야스 아르테스(Circulo de Bellas Artes)'는 이달 들어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즈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등 두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불러들여 강연회를 열었을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곳이다. 우리말로는 '문예클럽' 쯤으로, 영어로는 '클럽 오브 파인 아츠(Club of Fine Arts)로 옮겨질 '시르쿨로'는 1880년에 만들어졌고 강연 공간 외에 공연장.콘서트홀.극장.전시장 등을 갖추고 있다.

시 낭송회에 앞서 오전 한국문학세미나가 열린 마드리드 자치대학 2층 강의실.

진행을 맡은 권영민 서울대 교수(국문학)가 "한국문학이 스페인에 직접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르반테스 등 위대한 문학전통을 가진 스페인과 국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문학이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 '한국현대단편선' 출간 맞춰

번역자인 김은경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의 한국 현대문학사에 대한 소개와 신씨.임씨의 발표가 차례로 이어졌다. 한두명씩 늘어나 50여명에 이른, 주로 학생들인 청중은 신씨가 어린 시절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던 철길에 대한 기억, 임씨가 6.25와 광주 등 충격적인 경험 사례를 들어가며 소설가가 되기까지 내면의 변화를 고백하자 흥미롭다는 표정들이었다.

세미나는 물 대신 포도주 한병을 든 고씨가 단상에 오르자 여기저기서 터지는 낮은 웃음소리로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지난주 폭탄테러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인사한 고씨는 포도주 한병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연신 따라 마시며 이번에 번역된 65편의 '만인보' 중 12편을 낭송했다. 시 한편 낭송하고 술 한잔 따라마시는 고씨의 '파격'에 웃음을 터뜨리던 청중들은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술에 취하고 이어 시에 취한 고씨의 목소리와 손동작.몸동작이 저절로 커지자 청중 사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애통해 하던 왕고모가 문상 온 손아래 친척을 만나서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 싶게 이런저런 집안 대소사를 수다스럽게 물었다는 내용의 시 '대기 왕고모'를 고씨는 슬픔에 겨운 통곡조의 목소리, 방정맞은 아줌마의 목소리를 오가며 능청스럽게 낭송했다. 공동 낭송자가 아직 스페인어로 번역된 '대기 왕고모'를 읽기 전이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청중들은 마냥 즐거워했다.

*** 소설가 임철우.신경숙 발표회

고씨의 시 낭송은 퍼포먼스를 방불케 했다. 정열적인 동작과 육성의 울림을 통해 '만인보'의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왔다. 이 대학 2학년생인 루이사 페레스는 "드라마적인 시 낭송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시집을 당장 사보고 싶다. 그 안의 인물들의 모습을 경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후 7시30분부터 시작한 시르쿨로에서의 낭송회는 청중이 스무명에도 못미쳐 한산했다. 시르쿨로 관계자는 ^고씨나 번역자가 스페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연쇄 열차테러와 총선 등 스페인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가세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고씨.임씨.신씨가 모두 참가하는 토론회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두차례 더 열린다.

마드리드=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