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39.張鵬목사는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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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번에 공개된 「장붕(張鵬)보고서」는 그동안 일본측 정보기록이나 임정(臨政)의 공식기록에 나와있지 않은 임정 내 지도자들의 움직임과 국내외 독립운동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해 자료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기 상해임정연구에 큰 기 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편지형식의 「보고서」를 작성해 보낸 장붕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상해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원으로 활동했고 이승만과 가까웠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장붕의 활동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1919년 4월2일 인천(仁川)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열린 국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모임에 기독교대표로 참가하면서부터다.이 모임은 같은해 4월23일 전국 13道대표 24명으로 조직된 한성(漢 城)임시정부수립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장붕은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되는 과정에 막후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장붕 자신은 일제(日帝)에 체포될 것을 우려해 국민대회에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대회직전 서울을 탈출,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6월께 상해에 도착한 장붕은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돼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7월2일에는 상해임시정부 사료조사편찬부 위원으로 위촉돼 『韓日관계사료집』을 내는 일에 몰두했다.
다음해 3월부터 장붕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대통령에게 임정 내부의 동향을 편지를 통해 알리기 시작했다.사전에 이승만의 요청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20년 12월5일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자 장붕은 미리 만나 상해의 정세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와 이승만의 친밀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장붕의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다만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선교부장으로 있던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 이사(理事)로 그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이 확인된다.당시 그는 목사였다.
이를 통해 장붕은 어느 시점엔가(이승만이 대통령직 에서 물러난1925년께일 가능성이 크다)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해 체류시절 장붕은 여운형(呂運亨).손정도(孫貞道)등이 다니던 상해한인교회에 다녔으며,20년 9월8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1930년대에 목사신분으로 이승만과 같이 독립운동과 목회활동을 하던 장붕은 1940년대 초반 이승만이 주도하던 「동지회(同志會)」에 탈당서를 제출해 이승만과 결별했다.해방후 장붕이 빛을 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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