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공무원들에게 절대 물들지 마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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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기획재정부의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고, 사무관들도 교육받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다. 시대의 아픔으로 생각하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 인천공항 세관에서 열린 전국세관장회의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교육받는 건 좋은 일인데, ‘이게 뭔 소리냐’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말이 교육이지 보직을 받지 못한 공무원을 연수원으로 보내는 작업이었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강 장관은 이들을 다 껴안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정식 직제에도 없는 7개의 TF팀을 만들었다. 본지 보도로 이걸 안 이명박(MB) 대통령이 크게 화를 냈다. 그래서 TF팀은 없던 얘기가 되고, 당사자들은 짐을 싸고 연수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면서 강 장관은 자신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으로 ‘시대의 아픔’이란 표현까지 썼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MB와 호흡을 맞춘 강 장관이지만 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덕장이 좋다고들 하지만 MB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의 밑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관계는 뒷전이고 능력과 실적만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의 TF팀 신설을 비판할 때도 MB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사람으로 무슨 팀을 만드느냐”고 질책했다. “그런 식으로 TF팀을 만들어 유휴 인력을 모아놓고, 나중에 또 민간 기업에 전화를 걸어 ‘이 사람 좀 써 달라’고 부탁하고…. 제발 그런 나쁜 일 좀 하지 말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유난히 말이 많던 18대 총선이 끝났다. 결과는 다 아는 대로 한나라당이 과반을 얻었다. ‘친박’들이 뛰쳐나간 상황에서 이 정도는 그리 나쁜 성적이 아니다. 선거 결과를 놓고 뉴욕 타임스는 “북한 지도자에게 악재”라고 썼다. 김정일뿐만 아니라 공무원에게도 비보(悲報)다. 대선 압승에 이어 총선도 마무리됐으니 이제부터 MB의 본색이 숨김없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이 끝나고 새로운 인력 수요가 생기더라도 이들을 절대로 다시 부처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라”고 못 박은 데서 그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과거에도 정권 초기에는 공공부문 개혁이란 말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번은 좀 다를 것 같다. “과거 발상으로 모든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려 하지 말라. 민간에 맡길 것은 맡기는 게 정부의 할 일”이라는 그의 말을 공무원들은 결코 흘려 들어서는 안 될 듯싶다.

MB는 공무원, 그중에서도 금융관료에 대해 짙은 ‘을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이런 그의 심중은 인사를 통해 이미 드러났다. 현 정부조직이 과거와 가장 달라진 점 한 가지만 꼽으라면 금융위원회다. 금융정책과 감독 업무를 전담하는 부처가 처음 생겨난 것이다. MB는 이 조직의 리더를 뽑는 데 장고를 거듭했다. 관료 출신을 생각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금융정책을 다뤄본 똑똑한 인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는 무조건 민간인을 앉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금융 회사’가 아니라 ‘금융 기관’으로 불리는 이 동네에서 ‘갑’으로 군림했던 금융관료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전광우 위원장이다. MB가 금융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걸작이다. “공무원들에게 절대 물들지 마시오.” 공무원이 된 사람에게 공무원들에게 물들지 말라고 주문한 것이다. 안 좋은 관행과 습성을 가지고 있는 무리에게 휩쓸리지 말라는 뜻이다. 위원장이 민간 출신이면 부위원장은 관료를 선택할 만도 한데 MB는 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부위원장엔 자신과 교감이 잘 되는 이창용 서울대 교수를 앉혔다. 금융관료와 금융계에 대한 그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기존의 관료들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고 있다. ‘메가 뱅크’가 대표적인 예다. 정부가 주인인 산업은행·우리은행·기업은행을 하나로 합친 다음 팔자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회사들과 싸우려면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는 게 값도 더 잘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속셈은 다르다. 가능한 한 민영화를 늦춰 이들 은행을 계속 자신들의 영향권 안에 두고, 퇴임 뒤 자리도 만들겠다는 것이다. 법으로 매각 시한을 정했던 우리은행마저 매각이 지지부진한데 어느 세월에 세 은행을 묶어서 판다는 말인가. MB 주문대로 전광우 위원장은 정말로 이들에게 물들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5년간 공무원들이 얼마나 변할까. 이만큼 흥미진진한 퀴즈도 없을 듯싶다. MB 각본의 70% 선이 될지 30%에 머물지, 아니면 지금 이대로일지….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