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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티베트 자치 원할 뿐 독립 원치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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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10일(현지시간) 일본 나리타 힐튼호텔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나를 악마처럼 표현 한다”고 말하며 머리 위에 양쪽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뿔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나리타 AP=연합뉴스]

“누차 말하지만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내의 불교·문화와 같은 혼(魂)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치권을 원한다.”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72)가 10일 오후 일본 나리타 공항 인근 힐튼호텔에서 일본 언론, CNN·월스트리트 저널·AFP 등 제한된 내외신 기자 50여 명과 약 40분간 회견을 하고 이같이 말했다. 한국 언론사로는 본지가 유일했다. 그는 이날 인도에서 미국 시애틀로 가는 도중 약 10시간 일본에 체류했다.

그는 베이징 올림픽과 관련해 “처음부터 베이징 올림픽을 지지해 왔고, (중국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며 “중국 정부가 현실적인 판단을 해준다면 올림픽 개막식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국에 걸맞게 세계 평화에 큰 공헌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며 중국에 대해 도덕적 권위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최근 런던·파리 등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도중 벌어진 티베트 사태 항의시위에 대해선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는 인정돼야 한다”면서도 “다만 결코 폭력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

-최근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관련, 유럽과 미국 등 각국에서 항의 시위가 빈발하고 있는데.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역사도 오래된 나라다. 따라서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충분한 상황이다. 올림픽 성화 봉송과 관련해 여러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지지하는 나의 자세는 전혀 변화가 없다. 다만 티베트 내 국민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없고, 인권과 관련된 문제인데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다.”

-중국인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중국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티베트의 국민과 같은 형제자매로 지내 왔다. 티베트 문제가 발생하면서 중국 내에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는 반(反)중국’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티베트 내의 불교·문화·교육 등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다. 중국도 티베트와 이런 것들을 공유해 왔다고 본다. 군이나 외교는 중국이 관장해도 좋다. 다만 우리는 단지 진정한 자치권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지도부는 우리가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고 왜곡하면서 ‘반중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이후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일어난 사태는 티베트인의 마음속에 있던 깊은 분노가 터진 것이다. 이를 독립 요구와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됐다. 나의 베이징 올림픽 지지는 변한 적이 없는데도, 중국에서는 나를 악마처럼 이야기한다. 난 인간이지 악마가 아니길 바란다. 내가 악마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판단해 달라.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왜곡돼 (국제사회에서) 믿어져야 하는 상황이 슬프다. 여러 정황을 중립적으로 봐 주길 바란다.”

-티베트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가.

“이번 사태로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체포·투옥됐다는 정보가 있는데도, 중국 정부는 투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중립적인 국제 기구가 직접 티베트에 들어와 조사해 달라고 제안한다. 법을 어겼으면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에도 정치적인 의도에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철저히 조사해 가려내야 한다. 여러분이 동의하면 관심을 갖고 보도해주고, 아니면 잊어버려라.(큰 웃음)”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만 없으면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나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티베트 사태 이후 많은 국가 지도자가 걱정해 줬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이 티베트를 방문해 어떤 상황인지를 봐 달라고 국제사회에 부탁드린다. 왜곡된 정보와 불필요한 오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에 중국이 티베트 사태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란 전망도 있는데.

“최근 사태는 티베트 국민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신장(新疆)자치구에서도 티베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중국 정부가)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뭐든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폭력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방법이다.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 국민의 이미지도 높아진다. 중국은 국력에 맞게 세계 평화에 큰 공헌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도덕적 권위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날 자신의 발언이 국제사회에 끼칠 영향을 감안한 듯 회견 초반 표현에 주의했다. 그러나 회견이 진행되는 도중 목청이 높아지며 주먹을 쥐고 팔을 흔들면서 열정적으로 변해갔다.

이날 회견장에는 100여 명의 경호원이 배치됐으며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회견장 내부의 중앙을 테이블로 가로막았다. 소지품 검사에만 1시간가량이 소요됐다. 페트병과 우산의 반입이 금지되고 “흉기가 될 수 있다”며 철제 의자도 모두 철거했다. 그래서 50여 명의 취재기자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회견해야 했다.

나리타=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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