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연의패션리포트] 공작의 날개를 훔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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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앤디 앤뎁이 선보인‘공작’ 프린트 원피스.

소비자들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그런 소비자들에게 만족을 넘어 ‘감동’을 주기 위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 전쟁은 시공을 넘나들며 성역(聖域)도 없다. 카피(베끼기)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이디어를 찾아 멀리 여행을 가기도 하고 전문가 수준의 리서치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패션 디자이너들의 ‘영감(inspiration)’을 향한 갈증, 그 여정을 좇아 본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앤디 앤 뎁은 ‘공작’을 등장시켰다. 진짜 공작 같은 그림을 대담하게 프린트한 블라우스며, 스커트·드레스들이 신선했다. 피날레에 등장한 이브닝 웨어에는 공작의 깃털을 연상케 하는 작은 주름을 사용한 드레스도 선보였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작에서부터 타조의 형상을 응용한 스타일까지 낯선 소재를 우아하면서도 위트 있게 풀어낸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어느 다른 해외 컬렉션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성도 돋보였다.

며칠 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구호의 올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절제된 미니멀리즘(minimalism) 스타일로 잘 알려진 여성복 브랜드 구호는 이날 뜻밖에도 동양의 민속복 같은 강렬한 컬렉션을 무대에 올렸다. 알고 보니 디자이너 정구호가 얼마 전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다녀온 것. “색감과 소재, 실루엣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에 깊은 인상을 받고 왔다고 했어요. 그것을 기존 구호의 모던한 스타일과 잘 융합하는 것이 이번 컬렉션의 숙제였습니다.” 또다시 인도로 출장을 떠난 디자이너 정구호를 대신해 홍보 담당 최근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반응도 아주 좋았어요. 패션 기자들은 물론이고 매장의 바이어들도 대담해진 색감과 달라진 스타일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다는 쪽이었죠.” 디자이너 정구호는 평소에도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이라는 방법을 자주 택한다고 한다.

뉴욕의 디자이너 도나 카란은 한술 더 뜬다. 세계 각지를 돌며 영감의 원천을 찾아 민속복은 물론, 때로는 강변의 자갈이나 농가의 빗자루, 빛바랜 가족 사진이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이 빠진 도자기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다양한 물건들을 구해 오는 것만을 담당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단다. 부러운 직업이 아닐 수 없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찾아 떠나는 길은 절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순수한 창조 작업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공작을 컬렉션의 소재로 삼았던 앤디 앤 뎁의 디자이너 윤원정에게서는 조금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아이디어의 시작은 아주 간단하긴 했어요. 지난 시즌 액세서리의 소재 개발을 위해 깃털을 찾다가 공작의 깃털 색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걸 이번 시즌의 테마로 잡게 된 것은 공작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좀 더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공작람유(孔雀藍釉)라는 것이 도자기 중에서 공작새의 빛깔인 ‘청녹색(peacock blue)’을 띠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고요. 더 깊이 있게 리서치하다 보니 컬렉션을 풀어 가는 방식에서도 보다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었지요.” 그리하여 앤디 앤 뎁의 컬렉션은 공작을 도자기와 새의 중간쯤 있는 듯한 독특하고 은은한 실루엣과 청록빛으로 표현하고, 실크 스크린으로 투영한 프린트 등의 다채로운 기법을 이용해 완성도 있는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이번 컬렉션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으셨나요?’ ‘당신의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모든 디자이너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당당하게 결과물의 출발점을 밝힐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야말로 ‘카피’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남들이 지나치는 것을 잡아내 작품으로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닐까.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몇 년 전 자서전처럼 펴낸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말이다. ‘무엇에서든지 영감을 찾을 수 있다-못 찾겠다면, 다시 봐라(You can find inspiration in everything.-if you can’t, look again)’. 참, 폴 스미스는 책의 부록으로 작은 돋보기까지 붙여 놓았더랬다.

강주연 패션 잡지 엘르(ELLE)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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