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4. 인생 입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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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부산-제주 카페리호 취항 때 선상에서 만난 장일훈(左) 제주도지사와 필자.

장일훈(張日勳)이 헌병대장이 됐다? 천하의 수재를 자부하고 경성대학 예과에 들어온 친구가 겨우 그거야? 얼마나 예리한 친구인데.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그는 후에 제주도지사도하고 치안국장도 지냈다. 천관우와 절친했던 이순구(李舜九)가 경찰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도 겨우? 하는 의문이었다. 그는 후일 경찰대학 교장까지 지냈다지만 그때 우리들의 의문은 진정이었다.

그와의 추억이 하나 있다. 동대문 가까이 오장동이라는 곳이 있다. 추운 겨울날 나는 갈 데가 없어 오장동동회 2층에서 자취를 하며 기거한 적이 있다. 어느날 이순구가 한밤에 찾아오더니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는데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하나 써주지 않겠는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생각났다. 연애편지를 대필만 해주던 추남. 내가 그꼴인가. 써주었더니 잘 어울리게 된 모양. 다행이었다.

역시 인생엔 때가 있는 모양이다. 보트레이스의 캡틴 김해석(金海錫)이 결혼을 했다. 아주 예쁜 신부다. 오장동회 2층에서 내려다보면 지붕이 빤히 보인다. 일제 때 일본 게이오대학에 들어가 보트레이스 챔피언 노릇을 했다는 사나이. 함경도 경성(鏡城)출신인데 서울대 의학부에 들어와 보트부를 했다. 신창동(申昌東).구평회.김상경.최봉준.태호원(太好源)등 열심히 한강에 나가 에이트보트를 저었다. 역시 1등차를 타고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이원우(李元雨)의 결혼식도 이무렵이었던 것 같다. 삼선교 시장하고 붙어 있는 기다란 기와집이었다. 그가 5.16 직후 문공부 장관이 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시를 쓰겠다는 대구 출신의 신동집(申瞳集)이 바이올린을 가져와 축하 연주랍시고 치고이네르바이젠을 켠 것이 인상에 남는다. 어느 대목은 제법, 어느 대목은 그저 낑깽거리는 소리에 불과했다. 이 친구가 후일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타고 계속해서 큰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될 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박승찬(朴勝璨)이 조선은행 뒤쪽의 어느 근사한 건물에서 강가를 갈 때 내가 종이 조각에 '사발시계 하나 예과 동기동창들'이라고 써준적이 있다. 아무도 돈이 없었던 시대니까.

안국동의 정기섭이비인후병원의 아들 정상기(鄭相基)가 어떻게 됐더라? 말을 탈 정도의 집안이었는데. 다급했던 당시의 부모들 마음이 그냥 있었을리 만무하다. 1등열차를 타고 난 사람들이 서둘러 짝을 짓는 세상이었으니까. 후일 한국전쟁때 그가 직격탄을 맞아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참담한 소식이었다.

윤억현(尹億鉉)이 장가를 갔다. 그것도 한영철의 누이동생하고. 한옥남. 숙대 학생이었다. 그들은 지금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북으로 간 것까지는 아는데….

구평회가 나에게 결혼을 권한 적이 있다. 그들 집안의 연줄인데 이화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대단히 궁금해졌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가. 1등차는커녕 3등차도 아닌 뚜껑도 없는 곳간차 맨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려 가는 것이 나였으니까.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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