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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시아버지 - 며느리 갈등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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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일러스트=이우일

초등학생인 두 딸을 두고 있는 서울시 길동 장모(42)씨는 아직도 시아버지의 '아들 타령'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딸을 낳았을 때 "아들 낳기 전에는 우리 집에 오지도 마라"는 시아버지의 말을 듣고 장씨는 단산을 결심했다.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가족 모임에서 번번이 "대가 끊겼다"는 시아버지의 말을 듣는 장씨는 그때마다 애꿎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한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시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속앓이하는 며느리가 은근히 많다.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난다는 가치관 급변시대에 보수적인 시아버지와 이기적인 며느리가 정면충돌을 빚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장씨는 "아들이 좋다, 딸이 좋다를 시비하기 전에 시아버지가 애를 낳아라 마라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소연했다.

'하이패밀리 사랑의 가정연구소' 이의수 사무총장은 "가족상담을 하다보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경우가 고부갈등보다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고 설명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법과 원칙으로 대접받는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며느리가 가장 '어른'인 시아버지 눈 밖에 나게 되면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사무총장은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우가 많아 부부갈등으로 확대될 위험도 고부갈등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정법률상담소의 이혼상담 중 '시아버지.시누이.시동생 등 시가(媤家)와의 갈등'은 3.7%로 '고부갈등'(1.0%)보다 훨씬 많았다. 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위원은 "시아버지.며느리 간 갈등은 처음에는 도덕적인 규범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다가 대화 등 일상적인 노력으로 풀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표출돼 해결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세대인 중.노년 여성들이 동창회나 종교모임 등을 통해 신세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은 반면 평생 직장에 매여 있던 시아버지들은 전통적인 가족문화의 향수에 젖어있다는 점도 며느리와의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 된다. 남아선호 사상이나 제사.명절 문화 등에 있어서 시어머니보다 훨씬 보수적인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당에 사는 김모(32)씨는 "시댁 김장날만 해도 시어머니는 애가 어리니 오지 말라고 하시고 시아버지는 그건 도리가 아니라며 오라고 하신다"고 말했다.

퇴직 후 몰두할 취미생활이나 친목모임이 없는 시아버지들이 가족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인천시 산곡동 한모(60)씨는 남편과 며느리 사이의 불화로 안절부절못 한다. 남편은 분가해 살고 있는 아들 가족이 주말.휴일 등에는 한씨 집을 찾아와 식사를 함께하기를 바라고, 며느리는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에는 시아버지.며느리 사이에 큰소리까지 났다. 지방에 사는 딸.사위가 방문하자 남편이 들뜬 마음에 며느리에게도 오라고 연락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찾아온 며느리는 "친정에도 가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주 올 수는 없다"고 남편에게 대들었다. 그 후 며느리는 정기적인 주말 방문의 발길도 끊어버렸고 펄펄 뛰는 남편은 화병까지 났다.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시아버지들의 마음고생도 만만치 않다.

아들 가족과 함께 사는 김모(69)씨는 아들이 출근한 뒤 수영을 배우러 다니는 며느리가 영 못마땅하다. 여기저기 모임에 나가느라 손자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도 귀가하지 않는 며느리를 보면 가끔씩 '체면을 버리고' 잔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이런 시아버지.며느리의 갈등에 대해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직접 맞부닥치는 일은 피하라"고 조언한다. 고부 간에 느낄 수 있는 '여자''엄마'라는 공감대도 시아버지.며느리 사이에서는 기대하지 못하는 만큼 섣부른 충돌은 갈등의 골만 깊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김영애 가족치료연구소' 김춘일 전문연구위원은 "시부모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선을 정한 뒤 남편을 통해 시아버지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박진생 신경정신과 원장도 "시아버지의 굳어진 생활 패턴을 바꾸려고 해봐야 갈등만 빚을 뿐"이라며 정면충돌을 경계했다.

남성들의 상담전화를 주로 받고 있는 '한국남성의 전화' 이옥 소장은 "시아버지가 직접 며느리에게 충고를 하면 아무래도 이성(異性)이라는 점 때문에 거리감을 더 느끼게 된다"며 "아들을 통해 얘기하라고 조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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