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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대륙고구려성>3.安市城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안시성은 백암성에서 남쪽으로 약1백㎞ 떨어진 곳,수암을 거쳐압록강으로 가는 고대로를 제압하는 초입에 위치해있다.
안시성의 서북 방면은 요하 동쪽의 평야에 면해 있고,동남 방면은 만주 내륙의 험한 산줄기에 이어져있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안시성은 대륙혼을 일깨우는 하나의 상징으로 새겨져 있다.일당백의 기개로 당(唐)태종 이세민(李世民)의백만 대군을 격퇴한 전설적인 전투는 지금도 듣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고구려가 사라진 뒤 만주는 이국의 땅이 되었고 피침과 식민,분단의 천년 세월이 흐르면서 안시성은 아득한 신화의공간이 되었다.
실제의 안시성은 둘레 4㎞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대개의고구려 산성이 돌로 쌓은 것인데 비해 안시성은 능선을 따라 흙벽을 쌓은 토성이다.지금은 세월과 더불어 흙벽이 기존의 흙과 뒤섞여 서문터 입구에 있는 「영성자성(英城子城) 」이라는 표시석이 없으면 이곳이 성이었던가를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서문터 좌우의 흙언덕을 자세히 보면 일정한 높이에서부터 흙과 흙 사이에 줄이 나있어 성을 축조한 흔적이 드러난다.
또 동문지 오른쪽 성벽 밑 밭등에서 고구려 특유의 붉은 기와 파편이 심심찮게 발견돼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안시성 내부 평지에는 20여호의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 밖 편편한 곳을 비롯,사방 성벽을 따라올라가며 사과.배.복숭아등을 심은 과수원이 조성돼있다.
서문지에서 안쪽으로 마도(馬道)가 뚜렷이 보이는 성벽을 따라가면 동문지 못미처 성벽 아래 약1백50m 높이의 평원을 보며홀로 선 산이 있는데 당태종의 전투 지휘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산이다.지금은 그 산도 전부 개간돼 있다.
성벽 바깥에는 요동벌의 강풍이 세차나 성 안쪽에서는 다만 땀이 흐를 뿐이다.산성을 정했던 고구려인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당태종이 안시성보다 더 높이 흙산을 쌓아 공격했다는 설을 확인하기 위해 성 주위를 살펴봤으나 그럴듯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동행한 李교수는 『당이 인공적으로 쌓은 흙산이기에 오랜 세월동안 무너져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의 현 장을 보면 당이 적어도 안시성보다 높이 흙산을 쌓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안시성 전투는 야트막한 산의 토벽에 의지해,그것도 고립무원의포위 상황에서 나라를 구해내 극적 비장감을 더 느끼게 한다.
645년 4월 당 태종은 1백만 침략군을 편성,「복속」을 거부하는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한 부대는 요하를 건너 무순 신성을 공략하고,다른 한 부대는 발해만을 건너 요동반도에 상륙했다.돌을 날리는 포차와 성벽을 부수는 충차를 앞세운 당군은 파죽의 기세로 남으로는 요동반도 남단 대흑산산성을 함락시키고 북으로는 요동성을 강점한뒤 그해 6월30일 요하 계선의 가운데 전략지인 안시성을 포위 공격해왔다.
과거 수(隋)양제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친 요동성은 요하의 부교를 끊어 퇴로를 막은 채 달겨든 당 태종의 화공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고,백암성조차 성주가 항복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고구려는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군 15만여명을 안시성 원군으로 급파했으나 이들은 당의유인작전에 말려 성에 닿기도 전에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요동벌에 추위가 닥쳐온 10월까지 4개월간 불과 수만명으로 추정되는 안시성 군민(軍民)들은 성주 양만춘(楊萬春)의 지휘 아래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기록에 의하면 밤낮을가리지 않고 하루 6~7차례씩 거듭된 전투로 안 시성 주위는 글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으며 흙산을 서로 쌓고막느라 주위 지형이 변하였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당태종은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은채 퇴각했고 그후 두차례 더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실패하자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당과의 전쟁은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소진시켰고,당에도신라의 제휴 제의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퇴장을 불러오는 한 계기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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