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36.청산리전투보고서 작성 李仲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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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한독립군 북만주 통신부원으로 이승만(李承晩)박사에게『청산리전투 보고서』를 제출한 이중실(李仲實)의 본명은 용화(容華)다.그는 1890년(고종 27년)9월9일에 태어나 1980년 9월24일 사망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충북 음성(陰城)또는 평북 선천(宣川)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어 분명치 않다.심지어 국가보훈처에서발간한『독립유공자 인물록』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조차 서로다르다. 그는 나이 20세 되던 해인 1910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그곳에 있는 동양서원(東洋書院)에서 일을하면서 재미(在美)한국인들이 발간하는 국민보.신한일보.한민보 등의 총지국을 경영,국내외 각처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간 의 통신연락업무를 수행했다.또 시베리아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 참여,적극 활동했다.
1919년에는 북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등과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창건하고 무기 구입의 책임을 맡았다.특히 연해주(沿海州)에서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이자금으로 1920년 체코군으로부터 다수의 무기를 구입,북로군정서에 전달했다.1923년에는 북중국에서 신덕영(申德永)과 함께독립군자금 모집을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
곧이어 베이징(北京)에서 의혈단을 조직해 조선독립군에 비협조적인 중국인 펑위샹(馮玉祥)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미국인 길버트로부터 권총 17정을 받아 숙소에 은닉해 두고 기자신분으로 위장해 馮과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馮의 거절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7년에는 중국 산시(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함께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했다.이를 위해 헤이룽장(黑龍江)省에 토지3백만평을 구입키로 하고 자금모집차 1929년 최양 옥(崔養玉)등을 국내에 잠입케 했다.같은 해 4월20일 서울에서 춘천(春川)으로 가던 우편물수송차량을 기습 공격했다.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항일운동단체가 국내에서 벌인 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중 하나다.
광복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자청해 독립유공자로 행세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자 초대국무총리인 이범석(李範奭)은 그가 독립운동을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증해줌으 로써 1968년 대통령 표창,77년 건국포장,그리고 사후(死後)인 90년에는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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