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김민기 “어린이 뮤지컬 올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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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침이슬’로 낯선 이들을 하나로 묶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1990년대 아웃사이더의 일상을 따뜻하게 그려갔던 이. 바로 극단 학전의 김민기(57·사진) 대표다. 그의 작품엔 날카롭지만 섬세한 숨결이, 좌절하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끈이 있었다. ‘서정적 저항성’은 언제나 그가 부여잡고 온 테마였다. 그런 그가 요즘 어린이 뮤지컬에 푹 빠져 있다. 단순히 한두 개 작품을 실험삼아 올리는 외도가 아니다. 올해만 여섯 편이 예정돼 있다(표 참조).

“이제 손자랑 놀 나이가 됐으니깐요. 노후 준비 해야죠”라며 싱거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앞으로 학전은 어린이 전문극단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라며 사뭇 결연한 의지까지 내비친다. 그의 시선은 왜 아이에게 꽂혀 있는 걸까.

#교과서를 훑고 아이를 관찰하다

어린이용이지만 그의 작품에 아역 배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성인 배우들이 아이역도 맡고 어른역도 한다. ‘모여라 꿈동산’처럼 큰 인형탈을 쓰고 과장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며, 어딘가로 신나게 모험을 떠나는 스펙터클도 없다. 또한 “착한 아이가 결국 행복해진다”라거나 “이렇게 행동해야 칭찬받는다”는 식의 주입식도 아니다. “기존 어린이 작품들의 두 가지 큰 틀, 즉 ‘판타지’와 ‘교훈’을 거부한다”는 게 김 대표의 뜻이다.

대신 작품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 세밀화처럼 그려진다. 지난 2월 초연된 ‘고추장 떡볶이’에선 과잉 보호 속에서 성장해 온 두 형제가 엄마가 집을 떠난 사이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생생하고 코믹하게 묘사했다. 4일부터 무대에 오르는 ‘우리는 친구다’는 열쇠를 잃어버린 친구 뭉치를 위해 5000원을 빌려주고, 이를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짜내는 주인공 민호의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기존 어린이 작품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지만,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실의 꼬마들이 적나라하게 무대에 재현되는 셈이다.

대신 작품의 전체 톤은 심각하지 않으며 발랄 유쾌하다. 김 대표는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우리도 우리만의 세상이 있거든요’라며 어른들을 설득하고 싶었던 거죠”라고 말한다.

이를 위한 준비 작업은 방대하다. 우선 읽기·쓰기 등 국어책은 물론 수학·생활의 길잡이 등 무려 80여 권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샅샅이 훑는다. 어린이의 생활과 사고를 규정하는 기초 자료로 참고하기 위해서다. 단원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직접 탐문해 아이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10여 명에 이르는 초등학교·유치원 교사는 그의 든든한 자문위원들이다. “제가 10남매 중 막내거든요. 젊을 때부터 40여 명에 이르는 조카들하고 놀면서 ‘아이의 세계’에 너무 익숙했죠. 지금은 조카 손자·손녀가 훌륭한 모델이자 스승입니다.”

이런 생활의 단편들이 그대로 무대화되면서 작품은 살아 꿈틀거리게 된다. ‘우리는 친구다’의 “또 동생 핑계” “그만 하랬지. 넌 오빠잖아” 같은 대사들이 대표적인 예. “어른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가 사실 그 또래 아이에게 목숨을 걸 만큼 심각합니다. 자아가 싹트고 세계관이 막 형성되기 시작하니깐요. 돌이켜보세요. 아마 전 연령대 중 가장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매달렸던 시기는 초등학교 시절일 겁니다.”

#아이의 웃음에서 동력을 얻다

4일부터 서울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우리는 친구다’는 새로 이사 온 민호와 슬기 남매, 그리고 말썽꾸러기 뭉치의 투닥거리는 다툼과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극단 학전 제공]

2월 막을 내린 ‘고추장 떡볶이’와 이달 무대에 오르는 ‘우리는 친구다’는 해외 작품을 한국적으로 번안한 것들이다.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가 소속된 독일 그립스 극단이 보유한 작품들이다.

“루드비히는 60~70년대 유럽 학생 운동을 추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기득권 세력과 싸워 마침내 사민당 등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았지만 또 다른 병폐를 낳으면서 루드비히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죠. 이런 시기에 그를 붙잡은 게 ‘어린이’입니다. 거대담론이 약화된 시기에 사회적 약자의 실질적인 목소리를 포착하게 된 거죠. 어쩌면 지금의 한국 사회, 혹은 현재의 제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김 대표에게 어린이란 약자다. “지금 공연물들을 보세요. 주소비층인 20, 30대 여성 혹은 중년을 대상으로 한 대형물만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구조죠.” 그래서 그의 작업은 외로운 전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꿈은 원대하다. 김 대표는 번안극으로 워밍업을 한 뒤 내년부턴 아동문학가들과 협업으로 창작품을 꾸준히 올릴 예정이다. 전래 동화의 현대화는 마지막 수순. “30여 편은 올려야 조금 체계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런 거창한 목표를 떠나 어린이는 그에게 ‘행복함’을 주는 그 자체다. 조연출을 맡은 김은영씨는 “공연이 끝나고 3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문 대표님의 표정이 너무 천진했다”고 전했다. 김 대표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 때문에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민기표 ‘어린이 리얼리즘’이 과연 어디까지 ‘엔도르핀’을 전파할지, 지금 그 첫 막이 올라가고 있다.

최민우 기자

극단 '학전' 어린이 무대 일정

▶2월 고추장 떡볶이
▶4월 우리는 친구다
▶7월 슈퍼맨보다 강한(가제)
▶9월 바빠가족
▶10월 고추장 떡볶이(재공연)
▶11월 삼총사(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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