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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서울의 혼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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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오병상 런던 특파원

지난 13일자 영국 더 타임스 1면엔 수만명의 성난 군중이 피켓과 촛불을 들고 거리를 가득 메운 사진이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반(反)테러 대행진'이다.

지난주 200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열차 테러에 격분한 스페인 국민의 엄숙한 평화대행진이다. '폭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국민의 의지,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발언 등이 주요 지면을 장식했다.

같은 신문의 25면엔 대조적인 사진 4장이 큼지막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탄핵안이 통과되던 당시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진풍경이다. 의장석을 향해 신발과 명패가 날아가고, 검은 양복 정장의 남성 5명이 한 여성을 끌어내며, 한 의원이 투표함을 집어던지는 장면 등등. 기사 제목은 '서울의 카오스(혼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인터넷판에서 의원 수십명이 엉켜 멱살잡이하는 사진에 초점을 맞췄다. 사진 설명은 '의회민주주의-한국 스타일'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역시 비슷한 사진으로 지면의 절반을 채운 다음 '서울의 위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어느 신문이든 사진이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우리에겐 꽤 익숙한 모습이지만 외국인들에겐 이색적인 폭력의 현장이었고, 수백자의 글보다 한장의 사진이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한국식 의회민주주의의 진면목이며, 서울의 혼돈이자 위기라는 얘기였다.

기사는 사진의 이미지를 더 깊게 풀어주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위기가 겹쳤다"(더 타임스). 즉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북한 핵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설상가상(雪上加霜), 탄핵이란 극한적 상황이 터졌다는 설명이다. 결과는 "경제회복과 핵위기 해소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것"(파이낸셜 타임스)이다.

월드컵과 붉은 악마를 기억하는 축구광 BBC 기자는 "지나치게 다이내믹하다(Too dynamic)"고 촌평했다.

한국 정부는 월드컵 당시 우리가 보여준 역동성을 자랑하고자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국가 홍보에 주력해 왔다. 그것을 은근히 비꼰 것이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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