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대장정>8.노보시비르스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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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한다.어디든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일상(日常)이란 어쨌든 권태로운 것이므로,하루해란 누구에게나 길고지루한 것이므로.
우리 시베리아 취재단이 가는 곳마다 대중의 시선.주목과 인기를 끈 것은 삶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이와같은 정서 때문일 터였다.러시아인들은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취재 차량에 몰려와 큼지막하게 그려진 대륙 횡단코스를 짚어보며 『하라쇼( 좋다)』를 연발하곤 했다.
그 중에는 고려인들도 많았다.침실과 식당등이 꾸며진 취재 차량을 우리는 「삼성호텔」이라고 불렀는데(삼성중공업에서 만든 트럭임)고려인들은 이 호텔에 초대받는 귀한 손님 가운데 하나였다.그들은 우리가 대접하는 음식과 소주를 마시며 이 국생활의 애환을 들려주곤 했다.
가는 곳마다 고려인들은 우리의 친구겸 안내인이 되어 주었다.
특히 다음 목적지에 대한 그들의 조언은 전혀 현장과 다름이 없었다.일러준 대로만 하면 되었다.어떤 이들은 우리를 보내놓고 행선지에 전화를 주기도 했다.『고국의 취재팀들이 내일쯤 당도할것이니 마중을 해주시게.그들은 러시아를 모르거든….』 그런 인정을 맛보면서 시베리아 최대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로 향했다.이르쿠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차량으로 꼬박 2박3일의 여정.황량한 시베리아벌판,자작나무 숲을 헤치는 까마귀떼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멀리 원동(遠東)에서부터 들었 던 이상한 이름을 떠올렸다.가네히로.사람들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그를 찾으라고 했었다.시베리아 건설업계의 대부,일본 이름으로 통하는 고려인.어떤사람일까.
가네히로….
그러나 가네히로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받아 적어온 전화번호에 그는 없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러시아 정교회의 미사를 취재하기 위해 알렉산드르 성당을 찾았다.성당은 발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더욱이 이 날은 부활절을 며칠 앞둔 축일이었다.제대(祭臺)앞에서 겨우 촬영을 마치고 믿 음의 숲을 빠져나왔다.그때 누군가 우리 앞을 막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네히로요.반갑습네다.』 오척단구에 허연 백발,아직도완력이 있어 뵈는 단단한 몸집.손톱이 다 빠져 버린 두툼하고 작은 손.힘들었던 세월이 그의 얼굴과 손에서 짙게 묻어나왔다.
『서울말이 바빠서 미안합네다.』서울말이 서투르다는 것을 바쁘다고 말하는 그와 함께 사나흘동안 정말 바쁘게 지내면서 「가네히로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네히로.한국 이름은 김우광(金祐光)이라 했다.한달뒤면 환갑.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할린으로 갔다.징용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취업이민 케이스.58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유학해 전기대학에 입 학했다.졸업후 시베리아 굴지의 건설회사 「시바카데미(Sibacademy)」에 전기기사로 취직해 타고난 성실과 배운 기술로 고속승진을 거듭하더니 페레스트로이카 직전 사장에 올랐다.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자신의 주(株)를 확보,시베리아 전역을망라해 가장 성공한 고려인으로 불리게 됐다.
그의 「시바카데미」건설은 노보시비르스크의 「아카뎀 고라닥」을비롯해 웬만한 대형 프로젝트를 거의 독점하고 있으며,조립식 아파트로 이 지역에 건축붐을 일으키고 있다.
교사출신인 러시아 여인과 결혼해 1남1녀를 뒀는데 딸은 이미출가시켰고 아들은 은행원.
노보시비르스크시장등 부유층이 사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그는 서재에서 안동 김씨 족보를 내보이며 『여기에 내 이름이 있잖아』라며 자랑스런 웃음을 터뜨렸다.개방된 이후 두번씩이나 고향을 찾았던 그는 제일 먼저 족보부터 뒤져보았 다.내 이름이있을까.그런데 「祐光」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을 때 그의 심경이어떠했을까.엉엉 울었다고 했다.기쁘고 서러워서 울었다고 했다.
러시아로 돌아오자마자 명함부터 새로 팠다.그가 우리에게 건네준명함에는 김우광 성명 석자가 은 박의 영문과 노어로 박혀 있었다.가네히로는 그 옆 괄호 속으로 들어가고.
늙어가면서 마음 한켠이 헛헛해져 밤마다 보드카를 마셔야 했던사람,취기가 돌면 가사도 모르는 『황성옛터』를 흥얼거리며 『하라쇼,하라쇼』했던 사람.부인이 걱정스레 왜 매일밤 술이냐고,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고 하면 『니나다,니나다( 필요없다)』했던 사람.그 괴로움의 까닭은 단지 이름 석자 때문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나던 날 김우광씨는 녹용술 여덟병을 차에 실어주며 말했다.『이젠 내게 술이 필요없소.내 생각하면서 여덟명이 나눠 마셔요.』 김용범〈다큐멘터리감독.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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