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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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영지주의와 도마복음 <48>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요즈음도 나 도올을 ‘길 잃은 양’처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인 양 외친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디로 돌아오란 말인가? 참된 신앙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簡) 것이다. 그리고 매우 쉬운(易)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라”는 것은 매우 명료한 기준이 있다.

교회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 기준은 다음과 같다. 1)매주 일요일마다 빠지지 말고 열심히 교회에 나올 것. 2)다니는 교회나 관련된 교회단체에 열심히 십일조나 그 이상의 연봇돈을 낼 것. 다다익선. 은혜충만. 3)신약정경 27서의 유일한 권위를 인정하고,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것.

만약 내가 이 세 조항을 엄격히 준수한다면 대한민국은 물론 지구상 어디에서도 나를 훌륭한 크리스천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이 세 조항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조항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너무도 쉽고 단순한 것이다. 쉬움과 단순함은 모든 대승(大乘)종교의 특질이다. 대승종교는 그 대중성(popularity) 때문에 항상 정통성(orthodoxy)을 쉽게 획득한다. 그리고 그토록 쉽고 단순한 조항을 지키려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나쁜 놈들’이다. 이 나쁜 놈들에 비하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교회공동체의 화목에 이바지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물론 아주 ‘좋은 놈들’이다. 종교적 용어로 좋은 놈들은 ‘정통’이라 부르고 나쁜 놈들은 ‘이단’(heretic)이라고 부른다.

대승이라는 말을 초기기독교 교회사에서는 ‘보편적’이라는 희랍어 카톨리코스(katholikos)를 취하여 가톨릭이라고 불렀다. 가톨릭의 신념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Outside the church there is no salvation.) 이 명제 하나를 받아들이면 정통이 되고, 이 명제 하나를 거부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2000년의 가톨릭교회사를 일관하는 정칙이다. 가톨릭에 대해 종교혁명을 일으킨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근대적 조류도 이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교회론의 대세를 본질적으로 어김없이 수용하였던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조직에 복속되는 것이 신앙의 정도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공동체의 조직성을 무시하고 예수와 하나님을 나의 삶에서 무매개적으로, 다시 말해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전도사 같은 중간 브로커가 없이 만나는 것이 정도일까, 하는 문제는 이미 예수의 사후 직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사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격 유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조직을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조직을 거부하고 고독을 선호하기 십상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종교운동의 방향성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조직적 공동체운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뭉치게 마련이고, 고독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조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지게 마련이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로 날로 세력이 미약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종교는 철학과 달리 도그마(dogma)의 체계다. 따라서 강성해지는 사람들이 정통이 되고, 미약해지는 사람들이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초기기독교 운동에서는 이 이단이라는 말을 부르는 묘한 용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이단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였지만, 그 실 내용인즉슨, ‘고독한 구원’(solitary salvation)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의 강약으로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로 다가가는 나의 고독한 실존 내면의 앎을 구원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 특별한 앎을 그들은 그노시스(gnosis), 즉 영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많은 학자가 나 도올이 도마복음서라는 저작물을 영지주의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나 하고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도마복음서가 영지주의에 속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 신학계의 정설이다.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서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내가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문헌은 예수의 죽음을 AD 30년경으로 잡는다면 그의 사후 30년간, 즉 AD 30~60년 사이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의 시대상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크로상(John Dominic Crossan)이 제1기층(The First Stratum)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Christianity)라는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단과 정통의 구분도 없었고, 더구나 성경이라는 것도 없었고, 교회라는 것도 없었고, 영지주의라는 것도 운동의 실체로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서가 영지주의의 저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제기조차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와 영지주의의 관련성은 영지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엇갈리는 문제다. 하버드대학의 여류 신학자 카렌 킹(Karen L. King) 교수가 요약하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념은 다음의 네 카테고리로 규정된다.(What is Gnosticism?, p.172).

1.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한 이단적 발전이다(a Christian heresy).
2.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이다(one variety of Christianity).
3.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전의, 혹은 기독교의 모태적인 원형이다(a pre-Christian or proto-Christian religion).
4.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병존한 또 하나의 독립된 전통이다(an independent tradition).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영지주의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존의 네 가지 규정 모두를 말끔하게 털어내 버려야 한다. 기독교와 비교되는 그 무엇으로서 영지주의를 실체화하는 어떠한 작업도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영지주의를 서구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의(-ism)로써 규정되는 편견이나 분별심의 장벽을 근원적으로 허물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2000년 동안 정통주의라는 어떠한 주의적 기반 위에서만 기독교사의 모든 흐름을 설계하여 왔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라는 어떠한 이즘의 안경으로 도마복음을 엿봐서는 아니 된다. 모든 이즘의 규정이 파괴된 무전제의 편견 없는 시각으로 우리는 도마복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 진실 속에서 후대에 영지주의라고 잘못 규정된 어떤 사상적 경향성을 규탐할 수 있을 뿐이다.

도마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그 첫마디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라는 그 한마디! 살아있는 예수란 무엇이뇨? 물론 ‘살아있는 예수’는 ‘죽은 예수’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은 예수는 무엇이고, 살아있는 예수는 무엇인가?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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