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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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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정치인의 아내였다가 정치인이 된 여성들이 있다.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남편인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암살되자 평범한 주부에서 정치가로 변신했다. 반마르코스 진영에 가담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군부독재를 종식시켰다.

‘제2의 에바 페론’ ‘남미의 힐러리’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아르헨티나 최초의 선출직 여성 대통령이자 전임 대통령인 남편(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페르난데스)의 뒤를 이어 당선돼 부부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에 여성 대통령 1호를 배출한 바 있다.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이다. 후안 페론 사후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으로 자동 승격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의 아내이자 정치인은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며, 부부 대통령에도 도전장을 냈다. 힐러리 클린턴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퍼스트 레이디 시절, 정치인의 아내 자리가 마냥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의 섹스 스캔들을 묵묵히 감수해야 했던 그녀다. 빌 클린턴이 성추문을 사과하는 기자회견장에 그녀가 나타난 것은,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결정적 변수가 됐다. 이어 도덕적 위기에 처한 미국 정치인 사이에는 아내(가족)를 동반한 속죄회견이 유행처럼 번졌다.

최근 국내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한 박성범 의원의 아내인 신은경(전 KBS 앵커)씨가 남편의 지역구 사수를 선언해 화제다. 하필 공천된 상대가 나경원 의원이라 ‘미모의 여성 대변인’ 경쟁 구도로도 관심을 모은다.

물론 정치인 아내의 정치 입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정치적 출사표가 오직 남편을 대신하는 것일 때다. 정치인의 좋은 아내라는 것이 정치적 경력의 전부일 때다. 사실 오랫동안 정치인 가족 배경의 여성 정치인들은 후광 효과 덕에 성장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 정치인의 아내라는 자리에는, 정치인의 모범적 사생활의 증표라는 요구가 컸다.

그러나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내게 맞지 않는다”며 퍼스트 레이디 자리를 박차고 나오거나 미혼모 신분으로도 대통령에 당선되는 여성들이 나오고 있다. 더 이상 ‘여성’ 정치인이 아닌 여성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심판을 받고 있다. 정치와 관련된 여성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