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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의 고언] 1. 탄핵 정국 정치개혁 기회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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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임에 틀림없다. 취임한 지 1년2주일밖에 안 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정녕 한국 정치의 심각한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안전을 뒤흔드는 위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도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 과정에서 겪는 또 한번의 진통으로 이해하고 이를 발전의 계기로 삼는 여유와 자신감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한국 정치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어려운 고비마다 법과 절차에 따라 해결책을 찾아낸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두 전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고, 두 현직 대통령은 임기 중 아들을 감옥에 보낸 일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드라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민주국가를 지향해 온 우리 국민의 저력이 있기에 탄핵 정국의 혼란도 능히 슬기롭게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 법.절차 따라 국가 운영

국민은 어떤 형태의 쿠데타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차분히 법과 절차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 나가면 된다.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초법적 대응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거리로 뛰어나오는 행동은 민주정치에 대한 최대 위협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헌법재판소에 의한 탄핵심판 절차를 차분히 지켜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과 5주 후로 다가온 17대 총선을 통해 각자의 의견과 선택을 반영한다면 이번 사태에 대한 법적.정치적 정리는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유능한 관료집단을 가진 나라다. 풍부한 행정 경험을 지닌 국무총리의 리더십에 따라 탄핵 진행 기간에 국가를 안정되게 운영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보다 큰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탄핵 및 총선 정국 이후에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지향해야 할 국가 목표에 대한 비전과 국민적 합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에 겪는 정치적 파탄도 그러한 비전과 합의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다.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떻게 하면 국제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고 선진화를 향한 전진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런 목표를 향한 국가적 노력을 결집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국민이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다면 나라는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를 포함한 남북관계를 국제사회의 역학관계와 조화시켜 평화적으로 풀어감으로써 국가 안보와 번영을 동시에 성취시키느냐에 대해서도 뚜렷한 전략 구도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본질적 차원에서의 취약성은 국민의 정치권 및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위험 수위 밑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 돈 안드는 선거로 새 국회 구성

한편 절차적 차원에서 한국 정치는 안정된 수준의 국민적 합의를 조성하는 데 번번이 실패해 왔으며 이번 탄핵 사태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는 소수의 지지만을 받고 있는 집권자가 국민 다수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드는 한국 정치의 불행한 전통도 한몫을 하고 있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타협의 정치는 현행 '대통령 무책임제' 안에서는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이를 시정.보완하는 제도적 개혁에는 모두가 주저하는 고질적 불확실성이 절차적 차원에서 한국 정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정치가 처한 시련이 혹독한 것이라면 탄핵 정국과 17대 총선을 과감한 정치개혁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 우리 모두의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우선 흥분과 감정을 자제하고 헌법재판소의 판정을 기다리자. 그리고 돈 안 드는 공정한 선거로 새 국회를 구성하자. 그러고는 국가운영의 제도적 개선을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렇듯 새롭게 마련될 정치의 틀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어떤 선진 일류국가로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자. 이런 일련의 단계를 차분히 밟아 나간다면 우리에겐 밝은 내일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前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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