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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식품의약전문기자의Food&Med] 옐로카드 받은 살 빼는 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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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TV 토크쇼를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사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자신이 TV에 출연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출연 전까지 두툼한 뱃살을 빼기 위해 그녀는 마약 성분이 든 살 빼는 약을 복용한다. 어느덧 폐인이 된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방송국에 가서 자신의 출연 시간을 묻는다….”

할리우드 영화 ‘레퀴엠’에선 살 빼는 약을 복용하다 마약중독자가 된 중년 여성 사라(엘렌 버스틴 역)의 파멸 과정이 그려진다. 살을 뺄 수만 있다면 마약류라도 마다않는 ‘사라’는 국내에도 수두룩하다. 이들은 줄여서 ‘향정’이라고 불리는 향정신성 의약품(마약류)을 살 빼는 약으로 복용한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향정 비만치료제의 매출은 2001년 이후 10배 이상 급신장했다. 2006년 한 해 동안 345억원어치를 팔아 제니칼·리덕틸 등 전문 비만치료제 수입액(120억원)을 추월했다.

펜디메트라진·펜터민·디에틸프로피온·마진돌 등 ‘향정’은 불법 약이 아니다. 체질량지수(BMI)가 30 이상인 비만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승인했다.

그러나 ‘향정’의 인기와 의존성이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부작용 가능성이 크고, 장기적인 효과나 안전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다. 다음 세 가지 원칙을 망각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

첫째, 섞어 먹지 말자. 체중을 단기간에 줄이고 싶은 욕심에 둘 이상의 살 빼는 약을 동시에 복용하면 백해무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펜펜’(펜터민과 펜플루라민)이다. 이 두 ‘향정’을 함께 복용하면 치명적인 심장판막 질환의 발생 위험이 높아져 시장에서 퇴출됐다.

실익도 없다. 둘 이상의 약을 함께 복용하면 한 가지만 복용했을 때보다 체중 감량 효과가 뛰어나다는 의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둘째, 최대한 짧게 복용하자. ‘향정’은 4주 이내, 전문 비만치료제는 2년 이내가 허가된 최장 복용기간이다. 유럽의 35개 병원에서 실시한 연구에선 일부 ‘향정’을 3개월 이상 복용하면 일차성 폐성 고혈압 발생 위험이 23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복용 기간을 임의로 연장하는 것은 생명을 건 도박이나 진배없다. 무모한 사람은 의외로 많다. 한 단속 공무원에 따르면 1m68㎝·체중 54㎏인 26세 여성이 자신의 목표 체중(48㎏)에 도달하기 위해 ‘향정’을 2년이나 복용한 사례도 있다.

셋째,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국에서 구입하자. 온라인·암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향정’은 약효와 안전성을 믿을 수 없다. 가짜약일 가능성도 있다. 부작용이 생겨도 피해 보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그렉 크리처가 쓴 『비만의 왕국』에서 언급한 대로 “체중을 줄이는 데는 살 빼는 약보다 훌륭한 의사, 걷고 달릴 수 있는 공원, 날씬한 몸매의 가치에 대해 공감하는 친구, 아내가 차려주는 가정식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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