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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색문화공간>9.뉴욕 앤솔러지 필름 아카이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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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영화엔 꼭 스토리가 있어야 하나』『무대와 객석은 반드시 분리돼야 하는가』『영화.비디오.음악.미술.무용은 꼭 별개의 장르여야 하나.』 이런 의문과 실험정신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해방구」역할을 하는 곳이 뉴욕의 「앤솔러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AFA)다.
지난 5월4일 이곳에서 벌어진 무용공연 『To the Ways of Miss Billie』의 현장.무대 바로 밑에 놓인 임시의자에 관중들이 모여앉자 흥미롭게도 객석과 객석 양쪽의 복도등에서 공연이 시작됐다.출연자와 청중이 뒤바뀐 셈이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고독을 초월해 새로이 재도약을 시도하는 여인들을 그렸다』는 안무가 캐리 하우저(23)의 말대로 맨발의여성이 객석 사이를 기어다니기도 하고 갈구하는 날개짓을 반복하기도 한다.옷을 훌훌 벗어 던진 여성이 벽을 올 라가기 위해 버둥대며 공연은 끝난다.
자신이 백남준 공연팀의 무용수 출신이라고 밝힌 하우저는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객석을 무대로 선택했다』고 밝힌다.『돈과 명성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실험.창조하기 위해 공연을계속한다』는 그녀는 이날 공연에 쓰인 하얀 천이 자신의 침대 커버를 찢은 것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AFA는 문자 그대로 영화필름보관소다.이곳에 보관돼 상영되는영화들은 스토리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색 실험.전위영화들이다.영화 뿐만 아니라 이날처럼 전위무용.비디오아트.실험극등 기존의 틀을 벗어난 「실험예술」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공연된다. AFA관장 로버트 할러는 『이곳은 과거 잡범.풍속사범을 처리하는 즉심재판소겸 감옥이었다』고 건물의 유래를 전한다.그의안내에 따라 살펴본 1층 내부 바닥엔 군데군데 감옥의 쇠창살이잘린 자국이 남아있고 쾨쾨한 곰팡이냄새가 여전하다 .
1915년 건축된 이 건물은 60년 재판소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며 마약밀매자와 부랑자(홈리스)들이 우글거리는 버려진 곳이었다.70년 AFA를 설립,여러 곳을 전전하던 실험영화의 대부요나스 메커스(현AFA이사장)가 79년 5만달러 에 이 건물을구입,개조해 88년부터 실험영화의 메카로 탈바꿈시켰다.
이날 무용공연이 벌어진 1백80석의 2층 영화상영홀은 과거 재판정이었던 곳이고 1층에는 66석 규모의 비디오 영사실이 있다.지하실에는 조그만 화랑도 있어 화가.조각가.사진작가들의 실험적 작품과 진귀한 영화포스터의 전시공간으로 사용 되고 있다.
3층 필름저장고에는 소위 할리우드류의 상업영화에 도전한 아방가르드(실험.전위)필름 8천여개가 먼지쌓인 철제빔 선반에 가득보관돼 있다.40분동안 한 컷만 잡아 렌즈를 좁혀가는 영화,갓태어난 아기가 첫번째 눈을 떴을 때 비춰진 세 상을 그린 필름,20분동안 한 곳을 카메라가 왔다갔다 하는 마이클 스노의 작품,무인카메라가 캐나다의 하늘과 눈을 제 마음대로 찍도록 한 작품,기존영화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여주인공만 빼고 재편집한 것등 상상을 초월하는 실험영화들이 대 부분이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등 클래식은 물론 자신의 일기를 펜이 아닌 카메라로 제작한 요나스메커스,실험영화의 대부인 한스 리히터,마야 데렌,조지프 코넬,백남준,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등은 『영화1백년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할러는 말한다.
AFA에선 매주 2~3차례씩 이같은 실험영화를 상영,연 2만여명의 애호가.학자.학생.예술인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입장수입등 10만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30만달러는 기업.정부의 기부등으로 운영하고 유급직원은 3명뿐』이라고 「실험정신」의 난관을 호소하는 이곳에선 취재진에게조차 7달러의 입장료를 면제해주지 못했다.
글=崔 勳기자.사진=白鐘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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