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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무료 개방이 실효를 거두려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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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3월 14일 문화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2008년 5월부터 일반인들이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업무보고를 했다. 올봄부터 국민들은 제 돈을 내지 않고 공공미술관의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술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 조치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보다 걱정부터 앞선다. 과연 한국의 국립미술관이 무료 관람의 모델 격인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료 입장 방침을 지키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가 1838년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은 것은 특권층이 독점한 미술 감상의 기회를 대중에게도 평등하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예술적인 취향을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미술관의 설립 목적 덕분에 관객은 미술교과서에 실린 걸작들, 예를 들면 15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16세기 최고의 초상화 중 하나인 ‘홀바인의 대사들’, 르네상스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등과 같은 세기의 명작들을 공짜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시품의 질뿐만 아니라 수량도 관객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내셔널 갤러리는 친대중적인 미술관답게 수장고에 작품을 보관하고 일부만 보여주는 다른 미술관과 달리 전체 소장품을 모두 전시한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유일한 국립미술관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독자에게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다. 명색이 현대미술관인데 피카소의 작품 한 점 없다. 팝 아티스트인 워홀의 자화상(2점)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일류 소장품이다. 현재 국내의 상업 화랑들도 워홀 작품은 몇 점씩이나 갖고 있는데 말이다.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사를 장식한 걸작들을 소장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미술품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수집한 컬렉터들이 소장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유증하면 정부는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고, 국립미술관에 판매한 미술품에 대해서는 면세 등의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한국의 국립미술관에 걸작을 기증한 컬렉터를 소개하는 미담도, 정부가 공공 미술관이 세계적인 미술품을 소장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법안을 만들었다는 뉴스도 들은 적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완벽한 감상서비스도 제공한다. 미술에 낯가리는 관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소장처, 기증 배경, 구입 가격 등의 다양한 작품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미술교과서를 펼치듯 세심하게 전시장을 구성하고 연출한다. 하지만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예산과 인력으로 선진국형 관객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더욱 비교되는 것은 접근성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런던의 심장부이면서 영국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트래펄가 광장에 자리한 반면, 국립미술관은 과천의 호젓한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관객들이 길일을 선택해 찾아가야 할 형편이다. 자, 소장품은 빈약하고, 전시품과 관객은 겉도는 데다 교통마저 불편한 국립현대미술관에 열혈 미술팬이라면 모를까 공짜라고 환호하면서 달려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료 관람보다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 뛰어난 미술품을 소장하고, 관객의 눈높이를 배려한 다양한 감상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대중교통이 편리한 곳에 국립미술관을 건립하는 일이다. ‘공짜 구경 한번 잘했네’라는 관객의 칭찬을 듣고 싶다면 인기를 겨냥한 즉흥성 정책 제안에 앞서 공익을 위한 미술관, 열린 미술관의 성공 사례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화부의 실질적인 후속 조치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