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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하나에 8개 학과 교수들 소설가도 가세

중앙일보

입력

중앙SUNDAY
대전 KAIST 캠퍼스 한가운데 들어설 ‘KAIST연구원(KI)’ 건물의 설계도는 텅 비어 있다. 도면에는 건물을 지탱할 외벽과 기둥만 그려져 있다. 건물 내벽 역할은 유리벽이 대신한다. 말 그대로의 ‘오픈 랩(Open Lab)’이다.

5층 높이의 연구원 건물 1층은 기둥만으로 꾸민 필로티 공법을 사용한다. 2층에는 카페테리아와 연구 결과를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선다. 캠퍼스 안의 학생과 교수가 연구원 건물에 자유롭게 드나들고, 위층의 연구원들이 부담 없이 내려와 어울리며 그 자리에서 의견교환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2009년 완공되는 KAIST연구원 조감도. 1층을 기둥만으로 꾸며 개방성을 강조했다. KAIST 제공


유리벽과 카페테리아는 융합 연구를 내세운 KI의 상징이다. 하드웨어가 서로 섞일 수 있어야 소프트웨어도 융합한다는 기본 철학이 담겨 있다. 이상수 KI 원장은 연구원들 간 접촉이 최대화될 때 융합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실험실과 연구실은 전혀 다른 전공자들이 함께 앉도록 배치할 예정입니다. 열린 공간에서 얼굴을 익히다보면 함께 커피도 마시고 축구도 하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다른 분야에 대해 배울 기회도 생기는 겁니다.”

KI에는 바이오융합연구소·IT융합연구소 등 8개 연구소가 입주한다. 한 연구소 안에는 평균 8개 학과 이상의 교수들이 참여한다. 예를 들어 바이오융합연구소에는 생명과학과와 생명화학공학과, 물리학과, 신소재공학과, 화학과, 바이오 및 뇌공학과, 기계공학과,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가 참여하는 식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공끼리도 모였다. 엔터테인먼트공학연구소는 스토리 디자인을 강의하는 소설가 김탁환씨와 디지털 기록 보존소를 연구하는 전길남 교수가 함께 일한다.

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소통해야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서남표 KAIST 총장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서 총장은 그동안 학문ㆍ학과 간 벽 허물기를 강도 높게 주문해 왔다. 4년의 임기 동안 1년은 행정 개혁, 2년째는 연구 개혁, 나머지 2년은 숨 고르기를 하겠다는 게 그의 밑그림이다.

그 결과 KAIST는 지난달 ‘2단계 개혁 구상안’을 발표했다. 우선 고위험·고수익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실현 가능성이 낮더라도 장차 큰 수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연구과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낸 아이디어에 교수들이 달라붙기도 했다. 조동호 IT융합연구소장은 “기업이 지정해주는 연구과제만 받지는 않을 것”이라며 “20년 뒤, 3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연구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KI는 앞으로 독립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KAIST 내 모든 연구를 주도한다. KI는 캠퍼스 개혁의 중심에 서 있는 셈이다. 최근 부임한 28명의 신임 교수는 KI가 전공 분야를 직접 지정해 뽑은 인물들이다. 학과가 아닌 대학 차원에서 연구의 밑그림을 그려야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 총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람도 돈도 적으니 몇 가지 분야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 학과가 섞이고 부닥쳐 성과를 내놔야 합니다. 그래야 MIT 같은 세계적인 대학을 따라잡을 수 있어요.”

선택과 집중, 융합 뒤에는 경쟁이 숨어 있다. 성과를 내놓지 못하면 나가야 한다. 칸막이가 없는 열린 실험실이라 서로 어떻게 연구하는지도 다 보인다. 당연히 기존 교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KI가 기존 교수들보다 신임 교원들에게 참여를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I발(發) 융합 바람’은 비교적 순항 중이다. 지난해 9월 재미사업가 박병준씨가 94억원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설계도가 확정되는 대로 연구원은 이달 착공에 들어간다.

선승혜 기자 s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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