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환상 속에 그대가 있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호 16면

사람들은 가끔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 혼자 사는 집 안의 어둠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거나 누군가의 체온이 간절해지면, 혹은 비 오는 날 우산 속에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지면, 사람들은 무작정 사랑을 시작하곤 한다.

그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먹이만 주면 기뻐하는 강아지여도 좋고,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을 것 같은 신(神)이어도 좋다. 그리고 인형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십 년 동안 광고를 연출한 신예 크레이그 질레스피가 만든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그처럼 인형과 사랑에 빠진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작은 마을에 사는 청년 라스(라이언 고슬링)는 혼자 있어야만 한다. 마당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형수 캐런이 날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만, 라스는 형 거스 부부보다는 어릴 적부터 끌고 다닌 파란 담요가 친근하고,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편이 편안하다. 그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아픔을 느끼는 남자다. 그런 라스가 거스 부부에게 브라질에서 찾아온 여자친구를 소개한다.

덴마크와 브라질 피가 반씩 섞였고 혼자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그녀 비앙카는 실물 크기의 인형. 당황한 거스는 쓰레기통을 뒤져 인터넷 사이트 ‘리얼 돌’에서 보내 온 택배 상자를 찾아낸다. 비앙카는 고객이 주문하는 대로 얼굴 모양과 다리 길이 등을 조정하고 질(膣)까지 만들어서 보내주는 섹스 토이 회사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정신과도 겸하는 집안 주치의 버먼(패트리샤 클락슨) 박사는 라스가 망상에 빠져 있을 뿐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과는 다르다는 진단을 내리고, 거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비앙카를 사람 대하듯 한다. 그리고 라스를 위해 마음 착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비앙카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를 보면 가장 먼저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이 떠오른다. 자신이 만든 완벽한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처럼 라스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문 제작된 비앙카를, 피부가 닿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나 라스는 피그말리온과는 다르다.

환상을 현실로 만든 피그말리온과는 반대로 라스는 자신이 만든 환상 안에 머물고자 애를 쓴다. 어쩌면 그는 비앙카가 진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는지도 모른다. 라스가 도와주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인형 비앙카.

라스에게 비앙카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라스가 화를 내는 순간이 비앙카가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순간과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앙카에게 자신이 모르는 약속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자 라스는 “내 여자친구와 만나는데 미리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 거냐”면서 처음으로 비앙카와 말다툼을 한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단 한 번도 라스의 환상이나 마음속을 1인칭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갑자기 비앙카를 주문한 이유도, 환상 속에서 말을 걸어 오는 비앙카의 모습도 알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관객은 라스에게 마음을 쏟으면서 그의 마음속을 궁금해하고 그가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을 갖게 된다. 질레스피 감독도 그처럼 순수한 집중을 원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라스의 이야기와 그의 감정의 여행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보자면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어느 정신병자의 망상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보다 간결하게 생각해 보면 그저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라스를 짝사랑하는 마고는 직장 동료가 자기의 곰인형 테디 베어 목에 전깃줄을 걸어놓자 그 아이를 죽였다며 흐느껴 운다.

마을 사람 누군가는 고양이에게 옷을 입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UFO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테디 베어와 고양이와 UFO는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대답을 들려주고 자신만 느낄 수 있는 애정을 보내 주는 대상일 것이다. 그 때문에 라스가 어릴 적 놀던 호숫가 나무 위에 누워 비앙카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장면은 다른 모든 멜로 영화들처럼 평범하나 절절하다. 함께 있지 못했던 시간을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차가운 인형의 마음을 두드린다.

미국 평단과 질레스피 감독이 인정했던 것처럼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없었다면 라스는 조금 다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는 ‘노트북’으로 알려진 고슬링은 추운 겨울을 기다리는 기나긴 촬영 준비 기간 동안 라스의 외모를 다듬고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까지 생각해 냈다.

그는 투박한 스웨터와 머뭇머뭇 입술 위에 어른거리는 콧수염을 라스에게 주었고, 그가 마고의 테디 베어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해 살려내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제멋대로인 현실과 접촉할 때마다 흠칫 놀라는, 미세한 떨림을 부여했다. 그가 있어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한 남자와 그에게 세상을 열어 주고 떠난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