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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꿔! 나를 믿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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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꿔! 나를 믿자!

최근 유학설명회가 한창이다. 조기유학이 보편화되면서 나라와 형태도 다양해지고 하루에도 수십개씩 새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과연 유학만 가면 저절로 영어가 되는 걸까. 유학생들의 경험을 통해 성공의 비결을 알아봤다.

 ::: 강 수 민 <캐나다 몬트리올 교육청 기숙사 프로그램 참가자·grade 7>

2007년 8월 인천국제공항. 출국 안내방송이 나오자 부모님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엄마·아빠는 내가 질질 짜면 좋겠어, 아니면 웃으면서 가는게 좋겠어?” “엄마와 아빠는 당연히 후자지….” 난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처음 타는 비행기. 입에 맞지 않는 기내식과 장시간의 비행은 슬픔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캐나다까지 20시간.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내가 떠난 8월 28일 그대로였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레스터비 피어슨 교육청이 운영하는 기숙사. 집 떠난 첫날, 나는 캐나다에서의 밤을 무사히 보냈다. 꼬꼬댁 꼬꼬!! 실제로 닭은 울지 않았지만,
 “ Attention all students. Please come to the cafeteria right now. Attention all students….” 인터폰을 통해 외국인의 유창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아, 외국이구나’실감했다. 카페테리아에는 브라질·중국, 그리고 한국 학생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한곳에 살면서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이 갑자기 재미있게 느껴졌다.
 다음날, 캐나다에서의 쇼핑에 도전했다. 난 턱없이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혀를 굴려가며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어로 대답하거나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하지만 난, 자랑스러운 대한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역경을 뛰어넘어 더 용감하게 발음을 굴려가며 콩글리시를 계속했다.
  캐나다에서 겪은 고통은 이것 뿐이 아니었다. 아이들 앞에서 난생 처음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심하게 떨던 일, 영어를 못 알아듣고 시험 볼 교실을 찾아 헤매던 일, 유학 초기 친구를 사귀지 못해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일,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며 혼자서 침을 삼키던 일 등. 그런 일들이 지금의 나에게 재미있는 추억이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이제 반년 남았다. 지금의 나는 기쁘면서도 아쉽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다니…. 지금은 이곳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신난다. 내가 여태까지 배워왔던 영어를 실제로 쓰는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흐뭇하다. 하지만 이곳에 온다고 무조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믿고 열심히 공부할 때 비로소 실력이 쌓이는 것이다.

 :::김 겸 원

 “Hey, Will ! I’m gonna get married. You should come If you can.” 내 첫 Host Family의 장남이었던 Ross가 작년 8월 결혼한다고 보내온 이메일 내용이다. 처음엔 농담이려니 했다. 나랑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벌써 결혼이라니. 그런데 지난달 그는 정말 결혼사진을 보내왔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그들과 나와의 문화 교류는 계속되고 있다.
 2005년 8월, 친구들이 대학입시에 매달리는 고2 여름방학 무렵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이다호주 메리디언. 그곳에서 첫 번째 Host Family를 만났다. 또래의 아이들이 있어 미국 문화를 체험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가정이었다. 난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당에서 옥수수를 키우고 수확하는 일, 잔디밭을 매끈한 돌로 꾸미는 일, 종교가 없었지만 매주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린 일, 모든 가족행사에 참가하는 일 등. 게다가 형제·자매(brother & sister)와 함께 하기 위해 고등학교 합창단(Choir)에서 활동했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러나 어려움도 있었다. 선천적으로 장이 좋지 않아 현지 식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달 동안, 하루에 2~3번씩 화장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때로는 호스트 부모와 아이들 간의 불화 속에서 ‘오늘도 무사히’를 속으로 외치며 마음 졸여야 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해, 나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날 무렵. 학교수업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 남학생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먼저 관심을 갖고 다가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행사나 파티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쉽게 해볼 수 없었던 것들,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시도할 수 없었던 일들을 경험해 나갔다. 새로운 문화를 만끽하면서 ‘나를 바꾸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깨달아갔던 것 같다.

정리=프리미엄 라일찬 기자
자료제공=중앙일보에듀라인 www.joongangedu.com / 02-346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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