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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메드베데프, 나 못잖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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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열광하고 있다. 2일 대선을 전후해 모스크바에서 만난 택시기사·교사·사업가·연금생활자 등 많은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푸틴이 러시아를 구했으며 그를 이어갈 지도자는 메드베데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의 승리는 사실상 푸틴의 것이나 다름없다. 푸틴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지지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사람들이 푸틴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크게 ‘경제 발전’과 ‘국가 자존심 회복’ 두 가지였다.

푸틴이 집권한 2000년 이후 러시아는 매년 7%대의 고도성장을 해왔다. 몇 개월씩 밀리던 월급이 제때 나오고, 액수도 2~3배 올랐다. 물건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일은 옛 이야기가 됐다. 도로엔 고급 외제 차가 넘쳐나고 도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크게 늘었다. 러시아는 지난해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12위)과 이탈리아(10위)를 제치고 세계 9위로 올라섰다.

옛 소련 붕괴와 함께 떨어진 국가 자존심을 되살린 것도 푸틴의 인기를 떠받쳤다. 푸틴은 집권 초기부터 ‘강한 러시아’ 건설을 모토로 내세웠다. 석유·가스를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리고 미국과 서방에 맞서 국민에게 위안과 희열을 안겨줬다. 외부세계에선 권위주의 통치자로만 비친 푸틴의 인기가 높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이 바라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左>가 8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푸틴을 쳐다보고 있다. [모스크바 AP=연합뉴스]

푸틴보다 자유주의적이라는 메드베데프의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 ‘국익 우선주의’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푸틴이 뒤에 버티고 있고, 메드베데프도 이런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푸틴도 8일 러시아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메드베데프는 나 못지않은 민족주의자로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적극 지켜나갈 것”이라며 “서방이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운영 능력에서도 변호사 출신으로 러시아 최대 가스회사인 가스프롬 회장, 제1부총리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메드베데프가 푸틴보다 뛰어날 가능성도 있다. 푸틴이 수렴청정할 것이란 이야기가 많지만, ‘메드베데프의 러시아’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유철종 국제부문 기자<모스크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