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플레이션과 맬서스의 유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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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34면

농산물 값이 지속적으로 올라 인플레이션을 불러오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새로운 경제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국제곡물가격이 1845년 식료품가격지수(food-price index)를 만들어 발표한 이래 사상 최고의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며 ‘값싼 식료품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1974년부터 2005년까지 30년 사이 세계시장에서 곡물 값은 실질가격으로 75%까지 떨어졌었다. 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밀 값이 배로 폭등하고, 태양 아래 거의 모든 곡물가격이 최고기록을 경신하면서 2005년 이후 실질가격으로 75% 이상 뛰었다. 문제는 이런 가격 폭등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애그플레이션’이란 이름으로 경고를 발한 것이다.

70년대 말에 만들어진 용어 스태그플레이션은 성장 정체 속의 인플레이션을 의미한다. 연간 성장률이 제로에서 2%, 인플레이션이 연율 6% 이상인 경우로 대충 범위가 정해져 있다. 이번 농산물 가격 급등이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올지는 미지수다.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식료품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은 나라마다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다. 또 많은 나라에서 식품과 에너지 가격은 변동이 심하다는 이유로 핵심(core) 인플레이션 계상에서 제외돼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애그플레이션은 어떤 수치적 수준이라기보다 농산물가격 급등이 지속돼 인플레이션 우려를 증폭시키는 현상 정도로 이해함이 합리적이다.

애그플레이션 원인은 두 갈래로 설명할 수 있다. 세계 농산물 수요·공급의 구조와 역학(dynamics)이 달라진 것이 그 하나다. 통화와 신용의 무분별한 팽창 등 글로벌 과잉유동성의 부작용이 다른 하나다.

우선 중국과 인도 등 인구 대국들의 소득 증대로 곡물 수요가 급증한 데 비해 이상기후와 환경 악화로 공급이 뒷받침하지 못해 수급 균형이 깨졌다. 지난 10년간 세계 전체 곡물 수요 증가분의 40%가 중국 몫이다. 중국인들의 육류 소비는 85년 1인당 연간 20㎏에서 2005년 50㎏으로 급증했다. 반면 공급은 저개발 농업국들의 경우 수리시설 등 농업 인프라 미비로, 선진 농업국들은 그동안의 과소투자로 한정된 상태다.

게다가 고유가 여파로 바이오 연료 개발 붐이 일면서 수급의 역학도 급변했다. 미국은 옥수수 생산량의 20%를 에탄올 연료로, 유럽은 식물성 기름의 68%를 바이오 디젤용으로 돌리고 있다.

콩과 옥수수가 비싸지면 소비자들은 저렴한 대체 곡물을 찾게 되고 밀과 쌀 등 바이오 연료와 무관한 곡물 값도 올라간다. 또 이들 곡물을 원료로 한 사료 값이 오르면서 달걀과 육류 낙농제품 값도 덩달아 오르는 등 애그플레이션은 꼬리를 물고 진행된다.

글로벌 과잉유동성이 상품 투기로 이어지면서 ‘잊힌 상품(forgotten commodity)’ 곡물에 대한 투기도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아르헨티나 등 세계의 곳간들이 수출을 제한하고 일부는 막대한 보유 외환으로 사재기에 나서는 상황이다.

올해 세계 곡물 수요 증가분 2000만t 가운데 1400만t이 연료 생산에 투입되며 3~5년 내 곡물 값이 10배로 폭등한다는 불길한 예측도 나돈다. 곡물이 ‘인체의 연료’이자 자동차의 연료로 값이 폭등하면 그 최대 피해자는 전체 소비의 60% 이상을 먹거리에 의존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세계 각지의 도시빈민들이다. 가격 폭등으로 국제기관의 식량 원조 물량도 이미 급감하고 있다. 글로벌 식량 부족 사태라는 맬서스의 유령이 느닷없이 21세기 지구 위를 맴돌고 다닐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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