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전쟁文化 고개든다-戰勝50주년 맞아 곳곳에 기념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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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소련이 붕괴된 후 정신적 공백 속을 표류하던 러시아에 종전 50주년을 맞아 전쟁문화가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9일 세계의 눈을 의식하며 모스크바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진 제2차대전 전승(戰勝)50주년 기념행사는 러시아의 정체성(正體性)을 전쟁문화에서 찾으려는 크렘린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었다.
군사행진과 기념행사가 열린 主무대는 붉은 광장이 아니라 181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에 무릎꿇고 퇴각한 포클론나야 고라(절하는 언덕이란 뜻)였다.對나폴레옹戰을 승리로 이끈 미하일 쿠투조프장군의 동상이 서있던 이곳을 러시아 정부는 5백억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전쟁기념단지로 재조성했다.
전쟁박물관과 참전용사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갖춘 27층짜리 전쟁기념관을 이곳에 건립하고 나치를 이겨낸 舊소련도시들의 이름을빽빽이 새겨넣은 기념비도 세웠다.전쟁기념단지 한 쪽에는 금으로지붕을 입힌 그리스정교교회를 세우고 13세기 스웨덴軍을 물리친전쟁영웅이자 성자(聖者)게오르기의 성상을 모셨다.
러시아정부가 막대한 재정출혈을 감수하면서 수도없이 많은 전쟁기념물을 곳곳에 새로 세운 이유는 현재 러시아가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70년을 지배해온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러시아는 새로운 정신적 지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크렘린 지도자들은 해답을 전쟁문화에서 찾기로 결정한 것이다.
9일 全모스크바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막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원수(元帥)의 동상은 레닌동상 철거 후 처음으로 들어선 영웅기념비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의 전쟁문화는 뿌리가 깊다.차르시대부터 계속돼온 전쟁은의식면에서는 대국주의를,문학과 예술에서는 애국주의를 낳았다.레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나 최근 국내에서 히트한 TV드라마모래시계의 주제가「기러기」를 낳은 영화『17번 의 봄의 단상(斷想)』은 전쟁을 주제로 한 애국물이다.이러한 전통은 최근의 분위기를 타고 다시 살아나고 있다.
軍을 주제로 한 신세대문학이 태동하고 영화계는 전쟁역사물 제작에 바쁘다.
에른스트 바기노프 모스크바副시장은 이번 전승기념행사의 목적은젊은 세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崔聖愛.전문기자.러시아文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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