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의 농구 30년] 타고난 '우승 메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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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지난해 전국무대를 휩쓴 용산중의 주역인 1년생 허재가 맹활약, 배재고의 골밑을 유린함으로써 결정적 수훈을 세워 3점 차로 신승했다."

1981년 4월 10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허재에 관한 첫 기사다. 당시 제18회 춘계 중.고 농구 연맹전 남고부 경기를 다룬 내용이었다.

한국 농구사에 허재만큼 뛰어난 선수는 없었다. 상명초등 4학년 때 농구공을 잡은 그는 농구생활 30년 동안 농구대잔치 최우수 선수상을 3회(91 .92.95년)나 수상했다. 프로농구에 와서는 98년 올해의 스몰포워드상, 97~98년엔 플레이오프 MVP와 베스트 5상, 99~2000시즌 베스트 5상, 2002~2003시즌 모범 선수상을 받았다. 84년 국가대표에 처음 선발돼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까지 참가했다.

왼손잡이인 그는 환상적인 드리블에 의한 뛰어난 개인 돌파 능력으로 외곽슛에 의존하던 한국농구의 패턴을 바꿔놓았다. 넓은 시야와 송곳패스, 레이업슛과 정확한 외곽슛은 '농구천재'라는 별명이 붙기에 충분했다.

허재는 소속팀을 항상 국내 정상에 올려놨다. 용산중-용산고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중앙대 시절에도 김유택.강동희와 더불어 대학농구의 전성기를 누렸다. 4학년 때는 수원에서 열린 가을철 대학연맹전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혼자서 75점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중앙대 멤버는 다시 실업팀 기아로 이어졌고 농구대잔치를 휩쓸었다. 97년 프로 출범 이후에도 그는 97~98시즌 기아를 플레이오프 정상에 올려놨다.

'농구 9단' '농구 천재''농구 대통령' 등 최고의 찬사가 따라다녔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 한가지가 바로 '술'이다. 음주운전으로 다섯차례나 입건돼 비난도 쏟아졌다.

365경기 출장과 4524득점, 1572어시스트, 1148리바운드라는 대기록을 남긴 허재는 지난 시즌부터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평균 득점이 한 자릿수로 내려갔고, 1억6000만원의 연봉을 받은 올해 플레잉코치 겸 선수로 정규리그 47게임에 출전, 평균 11분26초를 뛰면서 경기당 2.3점을 기록했다.

92년 결혼한 허재는 부인 이미수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웅.훈)을 두고 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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