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18. 청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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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대 예과 동기생인 구평회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

한겨울이었다. 예과 기숙사는 불기 하나 없는 냉방이다. 밥이라고 나오는 건 보리와 수수와 약간의 쌀이 섞인 것이다. 반찬이라곤 소금과 설익은 물김치 두서너 조각. 국이라곤 콩나물이 두서너개 떠다니는 맹물에다 소금을 쳐 간을 맞춰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밤중에 토론하고 인간 세계의 내일을 걱정했다.

한밤에 배가 고팠다. 생각 끝에 나는 최신해 정신병원 옆에 있는 막걸리집을 찾아갔다.

"술 한 병만 주십시오. 돈은 없으니까 이 망또를 맡겨놓고 가겠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마셨는지. 얼마나 이 나라 걱정, 인간의 미래를 논했는지.

구평회가 와보곤 짐을 싸라고 했다.

"니 안 되겠다. 이렇게 추운 데서 어떻게 잠을 자나 …."

나는 창신동 그의 집으로 끌려갔다. 그의 형 구태회(具泰會)씨네였다. 구태회씨도 문리대 학생이었다. 참 호강했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두툼한 이불을 덮고 자니 살이 절로 오르는 것 같고 세계평화가 바로 이런것들이라는 게 아닌가 싶었다. 토요일마다 돼지고기 성찬이 나왔다. 꿀맛이다. 부엌일 하는 여자가 잘 먹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단다. 具씨 집안에서는 그 아낙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여겼단다.

진주(晋州)에서 비단 장사하다 부산으로 나왔다던가. 큰 형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LG 창업자 구인회(具仁會)씨다. 먼 훗날 나는 그의 일대기를 써주었다. 하루는 이 양반이 "보소. 내가 좋은 건강법 하나 가르쳐줄까?"

"예?"

"왼중일(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발에 땀이 나지?"

"예."

"그 땀을 씻고 자는 기라(것이다). 저 수돗가에 가서 차갑은(차가운) 물에 발을 담갔다가 깨끗이 씻고 자는 기라. 일년내내 감기 한번 안 걸린데이."

당장 그렇게 해보았다. "앗! 차거" 소리가 나왔는데 그게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발꼬랑내가 얼마나 심했으면 그런 소리까지 할까. "알았습니다"하고 매일 발을 씻었다. 이것이 具씨 집안하고 나하고의 긴 역사가 될 줄이야.

내가 거기 있으니까 함홍근(咸洪根)이 오고 안현우(安賢祐)가 왔다. 咸이 어느 날 평회한테 호소했다. 폴란드대사로 나가 있던 아무개씨 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편지를 썼다. 구평회, 니가 전해줄 수 없는가? " 구평회는 깔깔 웃었다.

"니 진짜로 그 여자한테 반했나?"

"반했다."

"니 진짜로 내가 가주기를 바라나?"

"평생의 은혜로 삼겠다."

"오케이! 내가 가주꼬마(가주겠다)!"

그러고 갔는데 본인한테 직접 전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咸이 크게 실망했다. 안현우는 안현우대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같은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존경하는 정지용(鄭芝溶)시인에게 갔다 오는 길에 말이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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