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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5.의동생 朴容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천지간에 6대독자로 태어난 李박사는 애당초 고독한 인간이었다.망명객으로서 하와이 땅을 밟았던 1913년,40세를 바라보는나이의 이승만에게는 부모처자 등 친족은 한사람도 없었다.그러나그의 곁에는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고 남들에게 자기를 치켜세워주는 지기(知己)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옥중동지(의동생)박용만(朴容萬:1881~1928)이었다.李박사는 이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급기야 1918년 박용만의숙적(宿敵)이 되고 말았다.
李박사와 박용만간의 미묘한 애증관계를 논급한 종래의 글들에서는 두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원인을 외교독립노선을 고집했던 이승만이 무장독립노선을 내세운 박용만과 사사건건 대립,그의 사업(성공)을 시기하고 방해한데서 찾으려한다.그러나 이화장(梨花莊)에 있는 李박사의 앨범속에 이승만과 박용만간의 돈독했던 우정을 기념하는 사진이 유달리 많이 간직돼 있는 사실로 미루어 승만(형)이 용만(동생)을 구박했다는 종래의 견해는 재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앨범속에 이승만의 라이 벌이었던 안창호(安昌浩).한길수(韓吉洙).이동휘(李東輝)등의 사진은 하나도 없다.
우선 박용만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자.박용만은 강원도철원(鐵原)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에 유학해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다가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귀국했다.1904년에 보안회(保安會)멤버로 활약하던 끝에 한성감옥에 투옥 돼 이승만을 만나 그곳에서 결의형제(結義兄弟)가 됐다.1905년에 출옥하자그는 승만(형)의 뒤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숙부 박희병(朴羲秉=朴章鉉)이 정착한 콜로라도州의 덴버로 갔다.이때 그는 이승만의 외아들 태산(泰山.1906년 사망)을 미국까지 데려다 주는 심부름을 했다.
덴버에서 만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용만은 1908년 당시한국 유학생이 제일 많이 모여 살던 네브래스카州로 자리를 옮겨링컨市에 있는 네브래스카 주립대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서 그는 정치학을 전공하는 한편 부전공으로 군사학을택해 일종의 ROTC과정도 이수했다.그는 1912년 8월 정치학 학사(學士)학위를 취득했다.
이 대학에 재학중 박용만은 1910년 4월 네브래스카州 헤이스팅스市에 있는 헤이스팅스大 구내의 기숙사(링랜드館)에 한인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를 개설하고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한인학도들(30명 미만)을 교육.훈련시켰다.
이어 그는 1911년 1년간 휴학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기용돼 예리한 논봉을 휘둘렀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유학시절 간간이 편지를 교환하면서 두어번 미국내에서 만났다.용만(동생)이 학사학위를 받고 또 한인 소년병학교에서 제1회 졸업생(13명)을 배출하던 1913년 여름 승만(형)은 불원천리(不遠千里)헤이스팅스大를 방문 ,박용만과 졸업생들을 축하해 주었다.
이 만남에서 두사람은 장차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을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합의했음에 틀림없다.그 결과 박용만은 1912년 12월초,그리고 이승만은 석달후인 1913년 2월초에각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와이에 도착했던 것이다 .
하와이에 정착했을때 박용만의 주(主)직책은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신한국보(新韓國報)』(나중에『國民報』로 개칭)의 주필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직책에 만족하지 않고 거창한 사업 한두가지에 착수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대조선독립군단(大朝鮮獨立軍團)」의 창건이다.
박용만은 1913년 6월11일을 기해-호눌룰루市 동북방향 큰산너머-쿨라우 지방 아후이마누에 있는 파인애플 농장(1천3백60에이커)에 「대조선국민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고 두달뒤에는 이 군단 부속의 병학교(兵學校.속칭「산너머학 교」)막사와 군문(軍門)을 준공했다.
이 병학교의 구성원은 주로 하와이로 이민 오기전 대한제국 군대에서 장교 혹은 사병으로 복무했던「광무군인」들이었으며, 그 학도수는 많을 경우 1백24명 정도였다.이들의 대부분은 파인애플 농장의 노동자로 낮에는 10시간정도 농장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 훈련을 받는 둔전(屯田)식 교육을 받았다.
교련기구로는 단총(短銃)39정,군도(軍刀)10개,나팔 12개,북 6개,목총 3백50정,그리고 교과서(영문)28종이 있었다. 이승만은 1914년 8월29일「대조선국민군단」의 병학교 막사.군문의 낙성식에 참석해「믿음」이라는 주제로 전도강연했다.이로써 미뤄볼때 승만(형)은 용만(동생)이 하는 사업을 되도록 밀어주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916년에 접어들면서 박용만의「대조선국민군단」이 실질적으로 해체된 원인은 우선적으로(일본의 요청에 따른)미국정부와 하와이 총독으로부터의「군단」해체 압력,파인애플 농장주의 군사훈련 반대,하와이 교포들의 재정능력 한계,외국 농장에서의 둔전식 군사훈련 실시의 무리,신문사 주필직과 군단장직을 겸임했던박용만의 지도력 한계 등에서 찾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다같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인걸이었다.그들 중 이승만이 한가지 일에 깊이 몰두하는 고슴도치(hedge-hog)형(型)의 노력가라면 박용만은 한꺼번에 두가지 이상의일을 해내려는 여우(fox)형의 야심가였다(벨린 의 『지도자 유형론』참조).하와이 섬은「고슴도치」와「여우」가 함께 서식하기에는 너무나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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