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중은행들 "곳간 좀 열어 달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시중은행들이 외화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 운용 방식이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시중은행이나 금융전문가들은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진 외환보유액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안전 제일’을 내세우고 있다.


시중은행에서 외화자금을 담당하고 있는 K팀장은 지난해 말부터 제대로 잠을 잔 적이 별로 없다. 자금조달 방법을 고민하느라 거의 매일 잠을 설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외화부채 상환자금과 운전자금 등을 해외에서 빌려오는 것이 K팀장의 주 업무.

▶“어떻게 써야 할까?” 서브프라임 사태로 국내 은행 및 기업들의 외화자금 조달이 꽉 막히면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을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 외환보유국이다.

하지만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여파로 국제 금융시장의 돈줄이 말라버리면서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금리가 급등한데다, 중장기로 달러를 빌려준다는 곳이 없어 외화유동성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은행이 외화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서브프라임 부실 여파로 메릴린치, 골드먼삭스 등 그동안 돈을 빌려주던 전주들이 오히려 돈을 빌리는 형국이 됐기 때문이죠. 올 들어 사정이 조금 나아지는가 했는데 서브프라임 여진이 계속되면서 애를 먹고 있죠. 두 다리 뻗고 잠자기는 힘들어진 것이죠.”

최근 시중은행들이 외화자금 조달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여진이 계속되면서 개점휴업 상태인 달러화 채권 발행시장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시중은행들은 대체시장인 유로화, 엔화는 물론 심지어 말레이시아 링깃화 채권 발행시장에까지 손을 벌리고 있지만 이마저도 금리 상승 등 발행 여건 악화로 고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달 중 2억~3억 달러 상당의 말레이시아 링깃화 채권을 발행하려 했던 수출입은행은 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말았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조달금리가 30bp (100bp=1%) 이상 급등했기 때문이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5년 만기인 말레이시아 링깃화 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현지에서 통화 스와프(Swap) 거래를 통해 달러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조달금리가 크게 올라 계획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월에는 국민은행이 300억엔 규모의 5년 만기 사무라이본드(일본 엔화 채권) 발행 계획을 취소했다. 이 역시 조달금리가 문제가 됐다.

당초 국민은행은 조달금리로 리보(LIBOR·런던은행 간 금리로 국제 금융시장의 기준금리)에 50bp 내외의 가산금리(신용위험을 감안한 추가 금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여파로 일본 금융시장마저 불안해지면서 가산금리는 100bp 이상 급등했다.

수출입은행과 국민은행이 잇따라 외화자금 조달에 실패하면서 엔화와 링깃화 채권 발행을 계획했던 우리, 하나, 농협, 신한 등 여타 은행들도 계획을 수정하거나 중단한 상태다. 국제 신용도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수출입은행과 국민은행보다 유리한 금리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한 국제부 관계자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중장기 외화자금은 사실상 거래가 중단된 상태”라며 “단기 외화자금은 어느 정도 거래가 가능하지만 조달금리가 2배 이상 높아졌다”고 전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국내 주요 시중은행의 단기(3~6개월) 외화자금 조달금리는 리보+20bp 내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산금리가 40~50bp 이상으로 급등한 상태다. 중장기 조달금리의 경우는 더 심하다. 현재 5년 만기 외화자금 조달금리는 리보+100bp 이상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무려 4배 가까이 폭등했다.

시중은행들의 외화자금 조달 문제는 국내 기업들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업들에 달러를 공급해야 할 은행들이 달러를 구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은행의 1월 말 외화대출 잔액은 159억 달러로 지난해 6월 말 대비 10억 달러나 감소했다.

은행들 외자조달 잇따라 실패

은행들의 달러 공급이 막히면 기업들은 해외투자 및 인수합병(M&A) 등 글로벌 경영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들이 직접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 국내 기업 중 자체 신용을 통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은 삼성, LG 등 일부 대기업에 불과하다.

외화자금 조달이 힘들어지자 시중은행들 사이에서는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유동성을 공급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즉 245조원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행이 대출이나 스와프 거래를 통해 시중은행에 달러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들의 외화자금 조달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조달비용 감소로 그 혜택이 국내 기업과 개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 운용 및 수익관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미 일부 시중은행 외화자금 담당자들은 직·간접적으로 이 같은 의사를 한국은행에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중은행 한 외화자금 담당자는 “한국은행이 보유한 달러를 시중은행에 대출 또는 스와프 거래로 빌려줄 수 있다면 해외에서 빌려오는 것보다 조달비용이 낮아질 수 있다”며 “서브프라임 여파로 조달금리가 폭등한 상황인 만큼 국부를 쌓아놓기만 할 게 아니라 국내에서 쓰이고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도 “26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의 10%만 시중은행에 개방해도 최근의 외화 자금난은 해결될 수 있다”며 “용도가 다르긴 하지만 국민연금도 해외투자를 위해 한국은행과 스와프 거래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을 절대 개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상시국에만 활용한다는 외환보유액의 목적에 맞지 않고, 시장 논리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 고위관계자는 “서브프라임 파장으로 외화자금 조달이 힘든 것은 알고 있지만 이는 국내 은행들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며 “따라서 자금조달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국내 은행만을 지원하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서브프라임 여파로 외화자금 조달비용이 높아졌을 뿐 조달 창구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며 “높아진 조달비용은 수조원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 은행들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또 시중은행 등에 외환보유액을 개방하면 자칫 과거 외환위기와 같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알다시피 외환위기는 외환보유액을 시중은행에 예탁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며 “외환보유액은 그 성격과 목적상 보수적으로 운용되고 관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의 이 같은 입장에 대해 시중은행은 물론 대다수 금융전문가는 “한은이 외환위기 노이로제로 인해 사고의 유연성마저 상실했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안전제일’이라는 극히 보수적인 사고로 인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시중은행 한 임원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경제 규모에 비해 비대하지만 활용도는 극히 떨어진다”며 “전 세계가 국부를 늘리기 위해 외환보유액의 다양한 운용방법을 모색하는 있는 상황에서 왜 한은만 안전을 고집하느냐”고 꼬집었다.

대형증권사 한 투자전략팀장은 “현재 국내 금융시장은 과거 IMF 때와는 많이 발전했고, 튼튼해졌다”며 “한국투자공사(KIC)가 설립됐지만 한은도 외환보유액을 국가 경쟁력 강화와 국민의 부 증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실제 한은은 외환보유액을 극히 보수적으로 운용, 관리하고 있는 상태다. 투자대상은 미국 국채 등 해외 우량 채권 중심이며 주식 실물자산 등은 아예 취급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자세한 운용 내역은 알 수 없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및 운용 특성상 외환보유액의 자세한 운용 내역과 수익률은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량 채권 위주의 자산운용을 감안하면 외환보유액의 연간 수익률은 6% 내외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또 투자 지역도 미국과 유로 지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측은 “외환보유액의 운용 내역은 국내는 물론 국제 금융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채권 위주지만 국가별·자산별 포트폴리오가 다변화돼 수익률은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고 밝혔다.

“안전제일 고집 버려야”

한은은 현재 외환보유액의 운용수익률이 높은 수준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주요 경쟁 국가들에 비해서는 초라한 수준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외환보유액을 싱가포르투자청(GIC)과 테마섹 등 정부 산하 자산운용기관을 통해 적극 운용하고 있다. 테마섹의 경우 지난 30년간 연평균 19%의 수익률을 실현 중이다.

이 때문에 2005년 국내에도 국부펀드인 KIC가 설립됐다. KIC를 통해 외환보유액 등 국부를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자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실탄을 제공해야 할 한은이 외환보유액 위탁에 반대하고 있어 KIC의 행보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은은 KIC 설립 당시 100억 달러를 위탁했을 뿐 정부와 KIC의 추가 위탁 요구에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안전제일’이라는 논리에서다.

이처럼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것과 달리 중국, 일본, 인도 등 여타 경쟁 국가들은 오히려 공격적인 운용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 1위 외환보유국인 중국은 지난해 중국외환투자공사(CIC)를 설립, 이미 국제 금융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상태다.

또 세계 2위, 4위의 외환보유국인 일본과 인도도 최근 국부펀드 설립을 통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태세다. 아시아 각국이 ‘외환보유액=안전제일’이라는 논리에서 벗어나 국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금융시장은 물론 정부당국자들 사이에서도 “외환보유액을 국내외 자산 등에 보다 적극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다른 나라 사례나 수익성 측면에서 외환보유액을 국내외 자산에 보다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도 “최근 국가 주도하에 풍부한 외환보유액 및 국부펀드를 활용해 저개발 국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자원 확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을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국부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원 빈국이라는 우리나라의 약점을 보강하는 데도 외환보유액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안에서도 외환보유액의 적극적인 운용이 화두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은 “아시아 금융허브 추진을 위해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상태다.

또 강만수 기획재정경제부 장관 내정자도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환율과 외환보유액을 중앙은행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이것은 정부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외환보유액의 적극적인 활용을 강조했다.

임상연 기자 syl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