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예멘에 ‘한국투혼’ 심는 박지현 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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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현역시절이던 1989년 탁구 최강전에서 백 푸시 공격을 하는 박지현.

한국 탁구를 세계에 심는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28일 중국 광저우 실내체육관. ‘열사의 나라’ 예멘팀 코치석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김택수· 유남규와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던 박지현(42)씨였다.

국내를 떠나 해외를 떠돌아다닌 지 벌써 14년째.

94년부터 2000년까지 몽골팀 탁구 코치를 거쳐 2003년부터는 예멘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박씨는 한국에서 탁구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주니어 국가대표를 비롯해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은 박씨는 94년 돌연 몽골로 떠났다.

“한국에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아서 나 하나 없어도 문제될 게 없지만 몽골은 달랐다. 탁구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으나 지도자가 부족해 돕고 싶던 차에 몽골탁구협회 초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몽골에서 탁구를 가르치며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 가정이 어려운 선수들은 무료로 지도를 해줬고, 집이 먼 사람에게는 자기 집을 숙소로 개방했다. 박씨는 처음엔 실망감도 많이 느꼈다고 했다.

“사람을, 선수들을 사랑한다는 게 말로는 쉽지만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박씨는 “이 또한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몽골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박씨는 예멘으로 옮겼다. 예멘 역시 탁구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으나 지도자가 부족했다. “예멘으로 옮기니까 한국에서는 저더러 ‘탁구 전도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멘도 탁구 불모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은 더러 있었지만 시설이 빈약했다.

28일 광저우 세계선수권에 예멘 선수단을 이끌고 참석한 박 코치 모습. [사진=문승진 기자]

지도자는 거의 없어 선수들끼리 물어 가며 배우는 수준이었다. 첫 4년간 그가 예멘에서 받은 월급은 170달러. 14세 승주와 12세 민주 등 두 딸을 둔 가장으로는 박봉이었지만 특별히 돈 쓸 곳이 없어 견딜 만했다고 했다. 자녀 교육은 외국인들끼리 홈스쿨을 조직해 가르치고 있다. 박씨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다른 문화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점은 장점이다”며 “아이들도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의 노력은 지난해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박씨의 지도를 받은 예멘 선수들이 지난해 이집트에서 열린 아랍대회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탁구에서 동메달을 딴 것이다.

이번 대회에선 하위 팀들이 속한 디비전4이긴 하지만 4전 전승을 거두고 있다.

그는 “그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면 예멘 체육계 인사들이 ‘축하한다’고만 했는데, 지난해 메달을 딴 뒤로는 ‘고맙다’면서 월급을 1000달러로 올려줬다”고 소개했다. 예멘의 대학 졸업생 초봉이 300~40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급여다.

이 같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그는 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이라크·수단 등 아랍 국가 9개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당분간 이슬람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 뒤 2~3년 뒤엔 국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지현(42)

▶출생=1966년 8월 10일 전북 전주 ▶가족 관계=부인, 2녀

▶출신 학교 및 소속 팀=전주남중-전주신흥고-제일합섬(86~92년)

▶ 입상 경력=아시아청소년선수권 남자단체 금, 남자단식 동, 남자복식 은(83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단체 금(86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남자단체 금(90년)

▶주요 경력=몽골 탁구대표팀 코치(94~2000년), 예멘 탁구대표팀 코치(2003년~현재) ▶취미=여행, 독서

광저우=문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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