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채영은 잠시 감정이 격해지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민우는 소설을 읽듯 상세히 얘기하고 편지를 줄줄 외는 채영의 기억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그래서 흥미롭게 그녀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데 드디어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그때 당신의 말을 듣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커다란 기쁨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소.죽음은 피할 수 없는 나의 길! 그렇기에 하늘은나에게 그토록 가혹한 운명의 짐을 짊어지게 한 것이오.나의 길을 걷는 것을 주저하면 주저할수록 현세는 고통으로만 점철될 뿐….그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가 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소.그동안 억지로 가정에 붙어 있는 불행한 나의 모습은 아내나 자식 모두에게 도 움이 안됐던 것이오….사랑하는 채영,이제 나는 나의 물줄기를 따라 주저하지 않고 떠나려하오.당신과 함께 강물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포옹했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그때 함께 죽었으면 좋으련만 당신에게는 또 당신 나름대로 풀어야 할 업이 있고 그 업에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 있기에 아마도 우리는 구조됐나 보오.당신을 향한그리움을 억누르면서 보낸 지난 1개월! 그동안 나는 내가 공부한 정신의학의 지식을 당신에게 전달하기 위해 나머지 내 생의 모든 시 간을 쏟았소.그리고 그 작업이 끝난 지금 그리운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바이오.당신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으나 아내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의무를 던져버릴 것같아 찾지 않았으니 용서해 주오.그리고 행여 당신은 내 죽음에 일말의 책임도 느낄 필요는 없소.당신이 그때 한 얘기는 그순간까지 준비된 나의 죽음을 조금 더 선명하게 일깨워 준 것에불과하니까….마치 피분석가가 스스로 거의 다 자기 문제를 깨달을 즈음 명료하게 의식화시켜주는,분석가의 해석(interpretation)의 타이밍을 당신이 차지한 것 뿐이오.당신이 노벨문학상을 꼭 받아야 하는 사연을 들었을 때 너무도 마음이 아팠소.아마도 그 남자는 당신을 현실에서 찾지 않아도 당신과의 사랑의 맹세를 잊지는 않을 것 이오.당신과 그 남자가 노벨상 수상식때 감명깊게 상봉하는 장면이 현세에서 이루어지기를…! 여기동봉한 것들은 내가 갖고 있는 정신과 책들과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정리한 정신의학의 지식들이오.당신의 문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그리고 이 편지 말미에 적은 사람들은내 학문의 지기들이오.그들의 학문적 특성 과 전문분야를 적었으니 당신의 작업에 참고하기 바라오.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하면 아마 기꺼이 도와줄 것이오.그들이 당신을 신뢰할수 있게끔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또한 함께 동봉하니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 시오.안녕,내 사랑!저승에 가서라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다….
당신의 민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