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워치] “40분 브리핑 위해 100여 개 예상 답변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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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 잠들면 세계의 눈은 지구촌 반대편을 향해 달린다. 목적지는 중국의 베이징이다. 세계의 변방에서 지구촌 중심으로 솟아오르는 중국을 살피기 위해서다. 세계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엔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서 있다. 그의 말로 중국의 정책 방향이나 고위층의 의중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죽의 장막’을 들여다 보는 유일한 숨구멍 역할을 했던 중국의 외교부 대변인 제도가 공식 도입된 것은 1983년 3월 1일. 올해로 꼬박 25주년을 맞는다.

◇첫 브리핑은 외교부 현관 로비에서= 1983년 3월 1일. 치화이위안(齊懷遠) 중국 외교부 신문국장이 처음으로 공식 대변인 직함을 달고 외신 기자들 앞에 섰다. 이날은 중국 외교부 역사상 최초로 정례 외신 브리핑을 시작한 날로 기록됐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도입하게 된 유래를 더듬으면 다시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82년 3월 26일 외교부 옛 청사 본관 로비. 특별 초청을 받은 외신 기자 70여 명이 취재수첩과 녹음기를 들고 한 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민복 차림의 그 남자는 준비해 온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중국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3월 24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발표한 중·소 관계에 관한 연설을 주목한다. 연설 중 중국을 비난한 내용에 대해선 단호하게 반대한다. 중·소 관계와 국제 문제에서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소련의 실제 행동이다.” 단 세 문장을 단숨에 읽은 남자는 순간 침묵을 지켰다. 전례 없는 브리핑에 초청된 외신 기자들 또한 꿀 먹은 벙어리였다. 질문을 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질문이 없으니 대답할 것도 없다고 판단한 듯 그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총총히 자리를 떠났다. 이 남자는 훗날 부총리까지 오른 첸치천(錢其琛) 당시 외교부 신문국장이었다.

그는 “브레즈네프의 연설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공개 천명하라”는 덩샤오핑 당시 최고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황급히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다. 이날 브리핑은 중·소 관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56년 촉발된 중·소 이념논쟁 이후 반목하던 양국이 이날 중국 외교부의 브레즈네프 연설에 대한 반응을 신호탄으로 관계 복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세계 기자들과 한판 전쟁=2008년 2월 14일 외교부 신청사 브리핑룸엔 300여 명의 외신 기자가 운집했다. 정확히 오후 2시45분이 되자 류젠차오(劉建超) 외교부 신문국장 겸 대변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양복 정장의 류 국장은 “춘절(설)을 즐겁게 보냈느냐”며 반갑게 인사를 던진다. 그러나 미소 속엔 다가올 설전에 대비하는 긴장이 감돈다.

류 대변인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미얀마 문제 담당 특사인 간바리가 18일부터 이틀간 중국을 방문한다”며 먼저 발표 소식을 전한 뒤 이어 “질문을 받겠다”는 말로 외신 기자들과의 ‘한판 전쟁’을 시작한다. “스필버그 감독이 수단 사태에 중국이 방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베이징올림픽 개폐회식 연출 고문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는데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중국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질문이 터진다. 이어 베이징에 등록한 세계 322개 미디어의 특파원 577명 중 이날 참석한 300여 명의 손이 여기저기서 올라가며 질문 경쟁이 벌어진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중국인 간첩 사건, 일본에서 발생한 중국산 ‘농약 만두’ 사건 등 민감한 이슈들이 잇따라 도마에 오른다. 질문을 소진한 기자들 앞에서 류 국장이 목을 축이느라 물잔을 집어들면서 브리핑은 끝났다. 평소와 같은 40분의 브리핑을 위해 대변인은 보통 100여 개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한다고 한다.

83년 3월 대변인제가 도입됐을 때 일주일에 한 번 브리핑만 했지 질문은 받지 않았다.

그해 9월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줬다. 88년부터는 브리핑 때마다 질문할 수 있게 됐다. 95년부터 현재와 같이 매주 두 차례(화·목요일) 정례 브리핑을 열며, 97년부터는 동시통역으로 진행된다. 질문은 영어로도 할 수 있지만, 대변인은 중국어로만 답한다.

◇출세 코스로 통하는 대변인=대변인제 도입 뒤 25년간 배출된 대변인은 23명. 90년대 후반 대변인 수가 두 명으로 늘었고, 2006년부터는 현재와 같은 3명 체제가 됐다. 외교부 신문국 국장이 수석 대변인, 부국장이 부대변인 역할을 맡는다. 대변인은 외교부에서 대표적인 출세 코스로 통한다. 보통 외국어에 능한 데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이 대변인으로 선발되는 까닭이다.

원조 대변인 격인 첸치천 부총리는 외교부장을 거쳐 부총리를 역임했다. 80년대 말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리자오싱(李肇星)은 주미 대사와 외교 부장을 지냈다. 90년대 초반 달변의 대변인으로 유명했던 우젠민(吳建民)은 프랑스 주재 대사를 거쳐 현재 외교학원 원장으로 활약 중이다. 또 튀는 유머로 화제를 모았던 선궈팡(沈國放)은 유엔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여성 대변인은 뉴질랜드 대사를 역임한 리진화(李金華)를 필두로, 판후이쥐안(范慧娟), 장치웨(章啓月), 장위(姜瑜) 등 모두 4명이 배출됐다. 최장수 대변인은 류젠차오 현 수석 대변인이다. 37세이던 2001년 최연소 대변인이 된 뒤 7년 째 활동 중이다. 명석한 두뇌 회전으로 유명한 류 대변인은 최근 한국 특파원들과 별도로 만난 자리에서 “현재 브리핑 시스템에 개선할 점은 없느냐”며 서비스 마인드를 보여 주기도 했다.

중국에서 외교부가 앞장 서 도입한 대변인 제도는 지난해 거의 모든 중앙정부 부처로 확대, 도입됐다. 지방 취재 제한도 풀었다. 세계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중국의 창(窓)’에서 출발한 외교부 대변인 제도가 이제는 중국 내부의 언로(言路)까지 활짝 열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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