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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경수로-목표인가 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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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北-美 경수로 실무회담은 북한측이「한국형 채택」「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일단 결렬됐다.구체적으로는 설계 주체,참조발전소 모델,주계약자,발주권등에서 견해차를 노정했다.그러나 회담 결렬은 이같은 표면적인 사유와 함 께 그 이면에 보다 근원적인 빗장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째로 북한은 경수로 건설을「목표」가 아닌「도구」로 간주하고있다.당장 풀어나가야 할 시급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터에 10년후께야 전력을 얻어 쓸 수 있는 경수로 건설 자체에 북한지도부가 진정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겠는가는 회의적이 다.10년후의원전보다 당장의 경화(硬貨)가 아쉬운 처지다.공장 굴뚝의 연기가 멈췄고,주민의 세끼 식사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지향적인 여유를 부릴 입장이 아니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문에서나 실무협상 과정에서 외견상 경수로문제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듯했지만 내심은 경수로를 가교로 해 당면한 난제들을 극복하겠다는 체제생존의 모색에 있다.그들의 구도대로가 아닌 형태의 한국참여는 카드의 효용도만 제한케 된다고생각할 것이다.
북한은 핵카드를 통해▲안보위협을 해소하고▲경제난을 극복하며▲對美.日관계를 정상화하는 세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다.소련이라는 보호막이 걷힌 상황에서 안보를 미국을 통해 보장받는 일,파산지경의 심각한 경제난을 서방자본 도입으로 회생시키는 일,외교적 고립을 모면하는 일등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들을 일괄 타결하려는 것이 북한의 정책목표인 것이다.경수로는 이같은 목표달성의 수단일 뿐 북한이 추구하는 우선적 정책과제의 본질적 내용이 결코 아니다.
경수로협상이 잘 안된 또하나의 이유는 현단계 남북관계의 기본성격에 기인한다.세계적인 탈냉전의 화해.협력기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도 얄타질서.냉전규칙이 엄존하고 있다.남북관계는 여전히 엄연한 적대.대결관계다.예컨대 이산가족간에 편지 한장 건네지 못할 만큼 고강도의 긴장이 유지되고 있고,DMZ를 경계로 상대방을 적방(敵方)으로 규정하고 병력이 날카롭게 대치하고있다.이것이 현실이다.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어떠한 논의도 공론일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적방에 대해 수십억달러 규모의 원조를 조건없이 제공해준 사례가 있었는가.또한 대결관계의 상대측으로부터 긴장된 경계심 없이 원조를 순수히 받은 사례가 있었는가.
이렇게 볼때 한국측에『중심역할을 양보하라』『하청업자로 참여하라』는등의 미국내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의 충고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낭만주의다.또한 트로이의 목마를 경계하는 북한측에 경수로 문제에서 한국의 이니셔티브를 무조건 수용하라는 것도 무리한측면이 있다.
남북간에 경수로와 같은 무거운 프로젝트.핵심분야의 협력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남북대화와 함께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뤄져야 가능하다.지난달 22일 美상원 외교위가 결의안에서『北-美관계 개선과 남북대화는 최소한 같은 속도로 진 전돼야 한다』고 결의한 것은 정확한 문제인식이다.
끝으로 경수로문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투명성 확보라는 목표가 희석되는 것을 각별히 경계해야 하겠다.北-美 제네바 합의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對北특별사찰,특히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등 을 통해 핵의혹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유보됐고,경수로문제만 핵심사항으로 부각된 상황이다.
경수로문제는 어차피「시간과의 싸움」인데 지난 92~94년중 미국 조야및 국내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됐던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보유량,1~3년내 핵무기 개발 가능성 논의들이 뚜렷한 담보 없이 봉합돼도 무방한가.
북한 핵의혹 증폭에 대한 대처문제가 당면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통일원회담협력관.行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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