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기업하고 싶은 나라’ 만들겠다는 이명박 정부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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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그렇게는 못하겠다.”

5년 전인 2003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 측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손병두(현 서강대 총장) 부회장은 이렇게 실랑이를 벌였다. 전경련 상무였던 김석중(현 헤럴드미디어그룹 전무)씨의 거취 문제 때문이었다. 김 상무는 당시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수위의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했고, 이에 발끈한 인수위가 손 부회장에게 김 상무의 사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손 부회장은 사표를 받을 수 없다며 버텼고, 한달 여 뒤 부회장직에서 밀려난 한 원인이 됐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 재계는 곤혹과 긴장 일색이었다. 당선인과 인수위는 재계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당선인 스스로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재벌개혁 과제는 흥정 대상이 아니며 반드시 관철하겠다”고 강조했다. 인수위도 상속 및 증여 포괄주의, 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 금융계열사의 계열분리 청구제, CEO 등의 공시서류 인증 의무화 등을 검토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7대 개혁과제 가운데 무려 다섯 개가 대기업 규제였다.

그로부터 5년 후 정·재계 관계는 확 달라졌다. 근 30년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 당선인이 전경련 회관을 방문했고, 사상 처음으로 현직 전경련 부회장이 장관으로 내정됐다. 인수위가 검토해 추진하겠다는 정책도 하나같이 재계 의견을 반영한 것들이다.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없애겠다고 하고, 금산분리를 완화하며, 지주회사도 활성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확 달라진 기업 정책=“노무현 당선인 시절 인수위는 생면부지의 386 운동권 출신 인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접촉해야 재계 현안을 설명할 수 있을지 등을 도통 알지 못했다.”

한 대그룹 관계자의 말이다. 당시 재계가 재벌정책을 쏟아내는 인수위에 대응해 하는 일이라곤 어떤 정책은 수용하고 어떤 건 끝까지 반대할지를 논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재계 입장을 설명하는 게 원천 차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인수위 멤버들이 거의 모두 ‘올드 보이’다. 재계와는 오래 전부터 접촉해 왔던 사람이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꿰뚫고 있다는 얘기다. 또 5년 전에는 노 당선인이 전경련을 방문하기는커녕 손병두 당시 전경련 부회장이 인수위를 방문하겠다는데도 거절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선인이 전경련을 방문해 규제개혁을 약속하고 투자를 부탁했다. 인수위도 재계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계속 물었다. 이 전무는 인수위가 원하는 자료를 공급하느라 지난 두 달간 매우 바빴다”고 설명했다.

기업 정책도 완전히 반대다. 지난 5년간 노무현 정부는 대기업 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왔다. 인수위 시절의 서슬퍼렇던 정책 가운데 일부 완화되거나 철회되기도 했지만 ‘억제 틀’은 그대로 유지했다. 가령 계열사 출자를 제한하는 출총제는 일부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대로 살아 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뜻하는 금산분리 제도는 오히려 강화됐다. 기업집단 내 금융보험사들이 아무리 계열사 주식을 많이 갖고 있어도 의결권은 15% 이상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종전에는 30%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앞장서 출총제를 폐지하고, 규제완화와 감세를 약속하고 있다. 규제완화가 대세란 얘기다. 구체적으로 출총제는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주회사 제도도 활성화된다.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도 폐지 가능성이 높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공정거래법은 경쟁촉진법으로 개편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프로젝트별 맞춤형 지원 서비스가 관건=이명박 정부가 시민단체 등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기업 규제를 푸는 건 투자 활성화 때문이다. 한 대그룹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원하는 건 빅딜”이라고 밝혔다. 규제를 풀어줄 테니 대신 재계는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해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대기업 정책을 담당했던 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규제를 완화해 기업가 정신을 회복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재계 역시 그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다.

문제는 규제완화가 투자와 일자리 확대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냐는 것이다. 상당수 그룹 관계자는 “분위기는 분명히 바뀌고 있으며 투자와 일자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도 확실하다”며 “그러나 실제 투자와 일자리가 늘어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 그룹 관계자는 “규제는 화끈하게 풀어야 한다”며 “기업 투자를 옥죄는 규제가 다섯 개라면 이 중 두 개를 푼다고 해서 투자가 살아나겠느냐”는 입장이다. 김용열 홍익대 교수는 “투자의 가장 큰 요건은 수익성”이라고 지적한다. 규제도 수익성에 큰 영향을 주지만 땅값과 세금, 인건비, 물류 등의 인프라 비용도 중요하다. 김 교수는 “인건비는 정부가 어찌할 수 없겠지만 세금과 땅값 등은 정부가 하기에 달렸다”며 “이런 비용을 낮추는 데 정부가 앞장서 준다면 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승철 전무는 기업 맞춤형 지원 시스템이 투자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무는 “가령 경기도 화성에 조성되는 미국 유니버설스튜디오는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며 “규제완화 정도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앨라배마주정부가 현대자동차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직원 자녀의 교육 등 숱한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해 준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며 “기업의 투자 프로젝트별로 맞춤형 지원이 투자 활성화의 근본 대책”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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