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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후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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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영재가 계속 출현하는 것에 발맞추어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재력 있는 후원자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비상한 재주를 가진 영재가 걱정없이 마음껏 자기 꿈을 위해서만 노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는다면 이들의 미래는 이미 성공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대다수 사람이 아주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음악의 재능은 다른 분야의 재능과 다른 점이 있다. 스포츠나 발레 등은 활동 기간이 제한적인 반면 음악은 그렇지 않다. 80세 넘어서까지 피아노 연주를 한 루빈스타인을 보더라도 살아온 생의 시간만큼 더 깊고 인간미 넘치는 연주를 할 수 있어야만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그렇기에 어린 음악 영재를 당장 여기저기 선보여 성공 타이틀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제한을 두지 않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특별한 세계를 그려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영재를 키우고 가꾸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데, 그들을 후원하는 일 역시 철학과 신념을 필요로 함은 자명하다.

영재는 참으로 특이한 점이 많다. 베토벤이 인생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작곡한 소나타 32번을 연주할 때 성인 연주자는 마치 그 고통의 과정을 다 경험해 본 사람처럼 연주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어린 영재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한다. 심지어는 그 곡을 연주하기 위해 그런 감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연주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 풍부한 연주가 튀어나올 뿐이다. 그것이 바로 재주다. 그런데 이들에게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을 주입시키면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을 잃어버려 타고난 재능이 숨어버린다. 세상 만물의 섭리와 인간 존중의 사랑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들의 마음은 여리고 예민하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신나게 무대를 향해 걸어나가는 모습 이면에는 어떤 연주자보다 더 조바심치고 떨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감춰져 있다. 후원자의 진정한 힘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이들의 여린 마음을 보듬고 쓰다듬어주어야 하는 일이 바로 후원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大公)이나 차이콥스키의 후원자 폰 메크 부인 모두 경제적 후원자이기에 앞서 정신적인 버팀목이었고 기대고 싶은 안식처였다.

음악가를 후원하는 일, 특히 음악영재를 후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또 화려한 역할도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만을 좇게 하기보다 음악 속에서 자기성찰이 가능하도록, 음악을 위해 이들이 겪을 숱한 외로움과 고뇌의 날에 이들과 함께 고통을 느껴주며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에도 쉬운 길로 돌아가지 말고 어렵더라도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은 영재의 순수한 영혼을 때묻고 병들게 할 것이다. 후원자는 영재의 재능을 이용하는 사람도 아니고 영재의 소유주도 아니다. 영재의 재능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사랑과 겸손의 철학을 가진 아름다운 문화인이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겸손함에서 비롯된 음악인에 대한 존중 없는 후원은 아름다운 음악 위에 추한 모습으로 군림하려 들게 하고 음악인을 소유했다는 불행한 착각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음악에 대한 겸손함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후원자가 그리울 뿐이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