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바둑, 진단과 제언 ③ 유창혁 개혁론의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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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궜던 ‘유창혁 개혁론’은 ‘상금제’와 ‘오픈전’으로 요약된다. 상금제는 1941년 일본 본인방전 이후 유지돼 왔던 ‘대국료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둔 기사에게만 상금을 주자는 것이다. 오픈전은 국내 기전에 일본과 중국 기사는 물론 아마추어도 참여할 수 있도록 대회를 개방하자는 것. 오픈전은 당연히 참가자가 대폭 늘어나게 되니까 상금제가 전제될 때 시행이 가능하다.

이 내용을 처음 소개한 것은 지난해 본지에 실린 “바둑에 시장원리 도입, 대국료 없애고 64강 상금제로”라는 유창혁 9단의 인터뷰였다(2007년 10월 26일자 25면).

팬들은 환호했다. 유 9단은 약 한 달 전 이 기사의 후속편으로 “오해를 불식하고 바둑계 위기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자는 바람”을 담아 인터넷 사이트 사이버오로에 “상금제-오픈전으로 바둑 위기 극복하자!”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개인 의견이란 단서를 달았다.

팬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절대 공감이다.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다”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바둑계도 순환이 돼야 한다” 등 지지 댓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동료 프로기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젊은 기사들은 무관심했고, 일부 노장 기사들은 한국기원 사무국(사무총장 한상열 5단)에 항의를 쏟아부었다. 한국기원 상임이사가 어찌 그럴 수 있나. 이사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창혁 9단은 “최고의 칭찬도 들었지만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욕도 많이 먹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프로기사는 대국을 하면 승패와 관계 없이 대국료를 받는다. 오랜 전통이다. 유 9단은 그러나 “이는 프로기사 수가 50명 정도일 때 적합한 제도”라고 말한다.

기사 수가 200명이 넘어선 지금 스폰서 입장에서 나눠먹기식의 대국료 제도는 홍보효과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다. 결국 스폰서는 돈을 쓰지 않게 되고 그 바람에 대국료는 부끄러울 정도로 낮아지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유 9단은 4인방 시절, 자신이 3억원 정도 벌고 최강자인 이창호 9단의 수입이 6억~10억원까지 갈 때 스포츠 스타인 이승엽씨의 연봉은 1억원 정도였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스포츠 스타들의 수입은 천정부지로 높아졌는데 바둑은 그대로고, 대국료는 반 토막 난 상태다. 그 여파로 유소년 팬이나 바둑 지망생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스폰서의 의욕과 팬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상금제로 골격을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이다.

오픈전도 경쟁을 강화하고 재미를 높이자는 취지는 같다. 국내 대회를 오픈하면 중국과 일본·대만 등에서 수백 명의 기사가 참가하게 되고 스폰서들의 관심도 높아진다. 오픈전은 동시에 한국 바둑이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프리미어리그로 자리하게 만들 수 있다. 시장도 커지고 기사들의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유 9단은 말한다. “지금은 한·중·일이 공동 패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젠 시장을 오픈하고 통합무대를 만들어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상금제가 되면 뭐가 좋아지느냐. 결국 상위 랭커들만 좋아지는 것 아니냐. 대국료마저 없어지면 늙고 가난한 프로기사의 복지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론에 대해 유 9단은 “프로바둑은 팬과 스폰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프로기전이 기사들 복지의 볼모가 될 수는 없다. 소외된 프로기사에 대한 복지 문제는 한국기원이 정책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유창혁 9단의 이 같은 주장은 그저 개인적인 주장일 뿐 한국기원의 정책으로 채택되기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안이 채택되더라도 투표를 통한 다수 프로기사의 지지가 필요한데 그게 언제일까.

무엇보다 한국기원엔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없다. 젊은 기사들은 무관심하고 중견 기사들은 변화의 회오리를 두려워하며 침묵하고 있다. 노장 기사들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복지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기 앞에서 바둑계는 오히려 불신이 증대되고 있다. 코 앞에 닥친 위기도 위기지만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인지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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