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름의 역사] 16. 청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육민관중.고교 선생과 학생들이 1946년 처음 연 체육대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했다.

달이 휘황찬란한 밤. 몇 백년 묵은 고목 밑의 공회당.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철학적인 동물들이 잠을 이룰 리 없다.

"암 브루넨 포르뎀 토오레 다 스테트 아인 린덴 바움." 김상경이 '보리수'를 선창하면 일제히 따라한다. 목청을 돋우는 사람은 구평회. 낭만의 극치. 괴테도 슈베르트도 저세상에서 미소하리라.

김상경은 '치고이네르바이젠'으로 옮겨간다.

"달아 달아 고요한 달아/구름 속에 헤매는 달아/어디로 가나 오늘 밤/그리워라 그 옛날 그 동무들."

모두 집시의 신세가 돼버린다.

'스텐카라진'도 부른다. '들장미'도 부른다. 낭만은 아무리 마시고 먹어도 배탈이 없다. 맑디 맑은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유응호(柳應浩) 선생에게서 배운 독일시. 한번 안 써먹을 수 있는가.

"데어 힘멜 하트 자이네 슈테르네/ 다스 메르 하트 자이네 페를레/ 아버 마인 헤르츠 하트 자이네 리베."

나는 그것을 한국말로 바꿔 읊는다.

"청천 하늘은 별을 가졌고/ 푸른 바다는 진주를 가졌고/ 나의 가슴엔 사랑이 있네."

배탈 없는 낭만이지만 어느새 코 고는 친구가 하나둘 늘어갔다. 사제리 골짜기는 서서히 고요해진다.

홍범희씨 집은 컸다. 잔칫상처럼 차려주는 부인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막걸리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원주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학교 이름은 거창하게 육민관(育民館) 중.고등학교. 이창수(李昌壽)라는 호인이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학생이지만 1,2,3학년이 다 있어 우리는 젊음을 몽땅 털어놓듯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천하의 수재를 자부하는 서울대 예과생들이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가르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나이 먹은 편이었다. 그들도 열심이었다. 짚으로 얹은 지붕의 커다란 창고 건물 안에서 영어를 낭독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이채로웠다. 선생과 학생 모두 진짜 공부를 가르치고 배웠다. 김상경은 빼어난 목소리로 노래를 가르쳤다. 보잘것없는 농촌의 파란 하늘로 아이들의 합창이 울려퍼지는 그 감동.

홍범희 교장의 기쁨은 하늘로 치솟았다. 흥업면 면장인 원씨의 좋아하는 얼굴. 커다란 기와집에 잔칫상처럼 차려놓고 덩실덩실 춤추는 그는 우리를 하늘이 보내준 천사라고 했다.

학생은 토박이 자제들도 있지만 판부(板富)마을에 모여 사는 월남한 피란민의 자녀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월사금을 제대로 못 냈다. 독촉해야 한다는 직원은 하나도 없었다.

선생들도 월급을 못 탔다. 아무도 보채지 않았다. 우리는 교대로 내려가 1주일가량씩 묵었다. 좌우가 충돌하는 서울의 카오스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한운사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