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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Wine 값보다 혀를 믿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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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여기 세 잔의 와인이 있다. 각각 3천원, 3만원, 30만원짜리 와인이다. 가격에서 무려 10~100배까지 차이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에 무관하게 자신의 취향을 따라 와인을 고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와인 애호가들은 그렇다고 확신한다. 와인 초보자들조차도 상당수가 자신 있어 한다. 과연 그럴까?

글쎄. 두 가지 실험 결과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우선 한국의 와인 소비자들은 여전히 와인을 혀로 구별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실험-블라인드 테이스팅1

우선 30명을 대상으로 와인 구별 능력을 시험했다. 실험 대상은 지난 2~5일까지 와인 바 ‘토토의 와인 구멍가게’(서울시 마포구 서교동)를 찾은 고객들이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지 1년 이내인 초보자는 전체의 3분의 1인 10명이었다. 1년 이상 경력을 가진 와인 애호가는 전체의 3분의 2였다. 10년 이상 즐긴 이도 있었다. 연령대는 20~40대로 다양했다.

이들에게 우선 세 가지 가격대의 와인을 제공했다. 방식은 가격만 사전에 알려주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 상표를 가린 채 맛만 평가하는 시음). 놀랍게도 절반인 15명이 3만원짜리를 가장 선호했다. 30만원짜리가 8명, 3000원짜리가 7명이었다. 30만원짜리가 아니라 3만원짜리를 가장 많이 고른 이유는 납득할 만하다. 실험을 진행한 소믈리에 곽세라(27)씨는 “시음 대상자들이 지나치게 비싼 와인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큰 반면 중간 가격대를 무난하다고 여겼다”고 말한다. 면접조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응답자의 사회적 규범 편향(social desirability bias)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응답자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답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결과1-한국 와인 소비자들은 아직 혀보다 귀를 더 믿는다

이 결과가 놀라운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다. 이 시음회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었다. 시음자들에게는 가격대가 모두 다른 와인이라고 했지만, 실은 같은 와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아르헨티나산 와인인 뤼통 리제르바 말벡(2005년)이나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인 루이 라투르 피노누아(2006년) 가운데 한 종류만을 시음했다. 둘 다 시중 와인 판매점에서 3만원가량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시음자는 같은 종류의 와인을 두고 각기 다르게 평가한 셈이다. 시음 대상자 30명 가운데 세 와인이 같은 와인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세 가지 와인의 맛 차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응답자도 이 10명이나 됐다. 곽씨는 “시음 시간이 달라 와인 맛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시음 전에 가격 정보를 들은 것이 와인 맛의 차이를 구별해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와인 소비자들은 아직 자신의 혀보다는 귀를 더 믿는 편이다.

#실험-블라인드 테이스팅2

첫 번째 실험 결과가 한국의 와인 문화나 와인 소비자를 지나치게 폄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목적으로 시음 방식이 설계됐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실험도 병행했다. 이번에는 트릭 없이 전개했다. 첫 번째 실험과 같은 기간 동안 시음회 장소만 달리했다. ‘토토’보다는 와인 경력이 비교적 오래된 고객들이 즐겨 찾는 ‘꼬메스타’(마포구 서교동)다. 시음 대상자는 30명으로 역시 와인 경력과 연령은 다양하다. 이번에는 진짜 가격대가 3000원, 3만원, 30만원인 와인 세 잔을 제공했다. 모두 프랑스 보르도산으로, 각각 라로크(빈티지 없음), 샤토 보네(2004년), 샤토 팔머(1997년)였다. 대신 이번에는 사전에 가격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그냥 가장 입맛에 맞는 와인을 고르라는 주문만 했다.

#결과2-와인 맛의 차이는 가격차만큼 크지 않아

이 실험의 결과 역시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명 가운데 와인 판매점에서 30만원대에 팔리는 샤토 팔머를 선택한 시음자는 13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7명은 각각 3만원과 3000원짜리 와인을 골랐다. 3000원짜리 와인이 가장 낫다는 응답도 6명이나 됐다. 와인 맛으로만 보자면, 30만원대와 3000원짜리 와인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샤토 팔머가 제값을 못하는 것 아니냐는 시음회 결과에 대해 수입업체 측은 “1997년산이 문제가 많아서”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 시음회를 주관한 소믈리에 한나(30)씨는 “한국의 와인 소비자들은 100배나 나는 와인 가격차만큼 와인의 맛 차이를 실감하지는 못하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

와인을 즐기거나 즐기려는 독자들에게 두 가지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간단하다. 엄청난 가격차만큼 와인의 맛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적어도 우리 입맛으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와인 리스트에 표시된 가격에 주눅 들지 말라. 소믈리에나 다른 사람이 권하는 와인에 압도되지도 말라. 그보다 먼저 자신의 주머니 사정부터 헤아려 보라. 그 다음 거기에 맞는 와인을 골라라. 무엇보다도 코르크를 따는 순간부터는 당신의 귀보다 혀를 더 믿어야 한다. 

글=이여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실험에 쓰인 와인 소개

루이 라투르 피노누아 (Louis Latour )

부르고뉴 대표 품종인 피노누아 100%로 만들어져 우아한 향과 섬세한 루비 색상이 특징이다. 강렬한 과일향이 부드럽게 전달되며 각종 육류 및 버섯요리에 잘 어울린다. 소비자 가격 3만2000원.

뤼통 리제르바 말벡 (Lurton Reserva )

아르헨티나 말벡 품종 100%로 만든 레드 와인으로 특유의 붉은 색상과 풍부한 뒷맛을 지닌 강렬한 와인이다. 각종 육류 구이요리 또는 강한 맛과 향의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 소비자 가격 3만1000원.

라로크 (Laroque )

프랑스의 대중적인 테이블 와인 VDT(Vin De Table)로 광채가 있는 투명한 붉은빛을 낸다. 풍부한 과일향과 부드러운 질감이 인상적이다. 소비자 가격 3500원(이마트).

샤토 보네 레드 (Chateau Bonnet )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같은 비율로 블렌딩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운이 매력적이다. 프랑스에서 레스토랑 판매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각종 육류요리나 치즈와 잘 어울린다. 소비자 가격 3만5000원.

샤토 팔머 (Chateau Palmer )

그랑 크뤼(Bordeaux Grand Cru)등급의 보르도 특급 와인. 메를로와 카베르네 소비뇽, 프티 베르도가 섞여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색과 맛, 향이 조화를 이룬다. 소비자 가격 2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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