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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북녘동포>27.경제난의 뿌리 6.무리배치와 사회노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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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주민들은 누구든지 해마다 일정기간 육체노동에 동원된다.사회노동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형태는 다양하다.
당간부나 사무원들은 매주 금요일 육체노동에 나선다.이른바 금요노동이다.인민학교 학생들은 주변 농장에 나가 물을 주거나 벌레를 잡는다.고중 3학년이 되면 본격적인 농촌지원에 참가해야 한다. 대학생들은 대형 건축공사나 다리건설등에 참여한다.올해는당창건 50주년인 10월10일 완공을 목표로 당창건 기념탑과 청류다리 2단계 건설사업이 한창이다.사로청기관지 노동청년에 따르면 이들 건축물을 짓기 위해 김일성(金日成)대학.평 양외국어대학.평양대동강고등물리전문학교등 평양시내 대학생들이 집단동원되고 있다는 것.나머지 각급학교들은 건설자재나 물자지원을 마련하는 한편 금릉2동굴과 문수동~연못동 도로확장공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민학교(국교)학생들은 주로 가벼운 일을 돕는다.
『인민학교 2학년말부터 사회노동에 참가했다.도로에 돌을 세우거나 가루 칠하기.벌레잡기등 노동의 종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가을에는 강냉이 뿌리뽑기나 두엄내기 전투를 했고 겨울에는 김일성 사적지 눈치우기 작업도 했다.』(김광욱) 『내가 살던 홍원군에는 벌레가 많아 6월이면 항상 벌레잡기 전투가 시작됐다.』(안명철) 『평양 대성인민학교 재학중에는 수업을 마치면 으레 파리.번데기잡기,나무심기등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특히 외국인이 올 때는 청소를 심하게 했다.』(임영선) 대학생들은 대학생활 5년동안 대체로 6개월 내지 1년간 대형건축공사에 인부로 동원되는 경향이다.
『함흥 수리대학 재학중 두차례 대형공사에 동원됐다.대학 5학년 때인 87년9월에는 보통강하류 숙섬사적지 공사에 동원되는 바람에 졸업논문을 위한 실습을 하지 못했다.84년에는 공사장인양각도 임시막사에서 배고픈 생활을 했다.1주일에 한번 받는 휴가 때마다 시내 친척집등을 찾아가 떡 20~30개,국수 네그릇정도 비우며 허기를 채웠다.장화가 지급되지 않아 찬물 속에서 맨발로 작업하는 경우도 많았다.건설중 철학과목 진도가 늦다며 하루 3시간씩 강의도 진행했다.항일 유격대식 학습방법이라고 했다.』(이정철) 『81년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김일성 생일 70돌을 맞아 김일성 경기장 증축공사에 동원됐다.김일성종합대학은 물리학부에서 2개학년이 나갔는데 동원은 김정일(金正日) 친필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김명세) 『대학재학중에는평성사적지 포장에 동원됐다.김일성이 삼화사적지에 들러「나무가 멋있다」고 했으므로 나무 근처를 포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김광욱) 직장인들도 직장마다 특성을 살려 사회노동에 참여한다.
함흥시 햇빛유치원 교사 여금주(21.여)씨의 증언.
『내가 근무하던 유치원에서는 부업지를 만들어 강냉이와 콩을 심었다.교원들에게 퇴비작업등 노동을 하라고 하므로 여름에는 아이들 보는 시간보다 부업지 가는 시간이 많았다.』 간호사 임정희씨는『병원에서는 주로 일요일에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심었다』며『의학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1인당 약초채취 계획이 있어 도라지.더덕.삼지구엽초.도토리.버섯등을 캤다』고 밝혔다.
『가장 일반적인 사회노동은 농촌지원이다.농촌지원은 고중3학년이 되면 시작된다.고중생은 40일 정도지만 대학생은 90일정도다.통상 1년에 2회로 나눠 간다.봄철엔 「모심기전투」,가을철엔 「가을걷이전투」에 참가하는 것이다.』(김광욱.이정철 ) 『평양철도전문대학 재학중 매년 황해남도로 농촌지원을 갔다.봄에는5월10일부터 70일,가을에는 상황에 따라 10일 정도 간다.
봄철에는 농촌지원 탓에 평양시 전체가 조용하다.』(윤웅) 김일성대학생 김명세씨의 증언.
『농촌지원은 봄철 2~3개월,가을철 20일 ~1개월 정도다.
규정은 대학생의 경우 매년 70일 이상이다.』 박수현씨의 증언. 『고중 3학년때부터 대학 전기간에 걸쳐 농촌지원을 갔다.길주.명천.선봉.온성지역 협동농장에 갔는데 통상 농촌지원 나가면학생들이 농장 강냉이를 습격하므로 농민들은 싫어한다.』 『국가에선 「학생 4백g 배급」이 원칙이지만 모내기 전투때는 5백g을 준다.시금치.된장.간장등 부식은 농장에서 댄다.』(엄만규)『일은 고되고 급식은 충분하지 않다.특히 대학생 농촌지원대는 제대군인 선동에 따라 강냉이를 훔쳐 술과 바꿔 먹거나 인근 농가에서 닭.계란등을 훔쳐 먹는다.』(이정철.신광호) 『고중생들은 학부모들이 모여 떡이나 국수등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임영선) 『처음 농촌지원 나갔을 때는 1주일이 지나자 학생들 모두가 집에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앓아 누운 아이들도 있었다.』(여금주) 농촌지원활동에 예외는 없다.이옥금씨의 증언.
『군사복무중에도 모내기에 동원됐다.황해남도 봉산에 모심으러 갔고 가을걷이는 평남 증산군에 갔다.모심을 때는 전국의 모든 조직원들이 30일 정도씩 다 나간다.군민일치라고 농장을 다니며나무도 해주고 청소도 해준다.그러면 농장에서 쌀을 거둬 떡을 만들어 준다.』 ***금요노동 군수공장을 제외하면 공장의 정전은 잦다.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므로 노동자들은 공장이 쉴 때 사회노동에 동원되는 경우도 많다.
『성천 차부속공장에선 1개월에 20일 정도 생산하고 10일 정도는 사회노동을 했다.일거리가 없으면 산에 가서 싸리나무도 하고 도끼자루도 만들고 하는 식이었다.』(김태범) 『당간부.사무직.비생산직 근로자는 금요노동에 참가한다.』(김영성) 기업소의 농촌지원도 사무원들이 나갈 뿐 간부들은 금요노동 대상자다.
하지만 간부들의 금요노동은 소풍날이라는 것이 귀순자 대부분의 증언이다.
『금요노동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농촌에 맥주등을 싸가면 농가에서 개를 잡아주기도 하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준다.따라서 간부들은 금요일에는 먹을 것을 싸가지고 나가 하루놀다 온다.』(임영선) 외교단사업총국 고운기씨의 증언.
『금요노동 때는 작업복을 입고 삽을 들고 나간다.88년에는 대성산 유원지에 김정일화를 키우러 갔다.그러나 하루종일 트럼프를 치며 놀다오곤 했다.
안전부원들도 안전부장과 함께 부업지로 금요노동을 나가지만 막상 일 나가서는 먹고 마시고 노니 소풍날 같다.금요노동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돌격대 고생 『돌격대의 작업은 험하고규율은 엄하다.먹고 입는 것도 말이 아니다.합숙소에는 이가 끓고 화구당번은 석탄 훔쳐오는 것이 일이다.』(정기해) 『상품유통은 돌격대가 시켜준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김형만.가명) 없는 것은 찾아내고 부족한 것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속도전 청년돌격대원으로 평양 통일거리 아파트 건설에 참여한백영길씨 증언.
『자재가 부족할 때가 많아 오전2시쯤 중대 단위로 일어나 다른 작업장에서 자재를 훔쳐다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먹는 것이부족해 인근 민가에서 돼지나 닭.김치등을 훔쳐다 먹는다.』 평남도 돌격대원으로 순천비날론공장 주택건설등에 참여한 김형만씨 증언. 『물자가 보장되지 않으니 의식주가 모두 한심하다.물자부족을 주로 훔쳐 해결하므로 「돌격대 인민군대 가는데 사방 백리간에 남는 게 없다」고들 한다.일요일은 쉬게 돼있지만 애국지원노동등 일을 한다.』 <유영구.최상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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