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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이처럼 뛰어난 품질을 뽐내면서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와인도 흔치 않다. 세계의 명사들이 사랑하는 샴페인 ‘동 페리뇽’ 얘기다.
한국은 사정이 다를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이 와인을 ‘동페리’로 줄여서 부른다. 거품경제 절정기에 도쿄의 중심가인 긴자(銀座)의 바에서 땅이나 주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펑, 펑’ 마개를 따는 바람에 급격히 대중적인 술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생산자인 ‘모에 에 샹동’이 과수요에 장단 맞춰 생산량을 늘린 것도 한몫했다. 이 보다 10여 년 전쯤만 해도 귀한 술이었던 동 페리뇽은 그 뒤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시중에 넘쳐났고 급기야는 수퍼나 할인 주류 판매점에서도 살 수 있는 술이 됐다.
더욱 불행한 것은 거품시대에 이름을 알린 탓에 ‘호스트 클럽 샴페인’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TV 드라마를 보면 호스트가 손님의 주문을 받아 “동 페리뇽 나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신나게 마개를 따는 장면이 등장한다. 호스트 클럽에서는 동 페리뇽 로제(핑크빛 와인)를 ‘핑동’이라고 부르며 병당 10만 엔이 넘는 가격에 내놓는다고 한다. 생산량도 적고 보석처럼 귀한 이 환상적인 로제를 그같이 경박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런 사정으로 샴페인 애호가이면서도 동 페리뇽을 꺼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지난해 파리에서 마시기 전까지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무슈 스도가 주최한 와인 모임에서 1978년산을 마셔 보고 그동안의 편견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 오래된 술은 환상적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기포는 여전히 아름답게 남아 있으며 입 안에서는 복잡하지만 기품 있는 맛이 났다. “어때요, 근사하죠? 역시 동 페리뇽이에요”라고 무슈가 말했다. 프랑스에서 이 와인은 예나 지금이나 명사들의 음료수다. 동 페리뇽에서 호스트 클럽을 연상하는 사람은 프랑스엔 없다.
동 페리뇽은 16세기 베네딕트파(派) 수도사의 이름이다. 우연의 산물이지만 ‘병 속에서 일어나는 2차 발효’를 발견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샴페인은 비발포성 스틸 와인이었는데, 그의 대발견 덕분에 현재의 발포성 와인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뒤 세계 최대의 샴페인 회사 ‘모에 에 샹동’이 동 페리뇽 수도사가 거처한 수도원 터를 사들여 공장을 세웠다. 동 페리뇽은 ‘모에 에 샹동’ 소유 특급 밭 중에서도 수령(樹齡)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서 거둬들인 포도로 만든다.
1978년산을 마신 뒤로 동 페리뇽의 팬이 되어버린 나는 올해 정월 1999년산을 사서 마셨다. 젊지만 단정한 기포와 기품 넘치는 술의 질, 산과 과일 맛의 멋들어진 밸런스는 ‘동페리’라는 약칭으로 불리기에는 아까운 최고의 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