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범이 만약 범행 부인했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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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22면

경찰이 숭례문 화재 직전 방화범 행적이 담긴 CCTV 화면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얼굴 판독이 불가능해 채종기씨 자신이 범행 경로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증거로 삼기 어려웠다. [뉴시스]

지난해 9월 2일 새벽. 충북 청주시 북부시장 부근을 지나던 택시기사 김모(50)씨가 차를 세웠다. 여관 주차장 앞에 회사 동료의 택시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런데 저 사람은?’ 동료는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택시 안을 뒤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김씨는 택시로 다가갔다. “당신, 뭐야?” 김씨는 남자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남자는 “내 차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잠깐 들여다봤을 뿐”이라고 했다. 몸싸움을 한 지 3분 정도 지났을까. 남자는 김씨의 옆구리를 힘껏 때려 넘어뜨린 뒤 달아났다. 뒤쫓던 김씨는 버스 정류장에 세워진 택시를 발견했다. 김씨가 다가가자 택시는 급출발했다. 충북 XX바XXXX호. 경찰은 문제의 택시기사 A씨(45)를 긴급 체포했다. 김씨를 불러 범인 식별실에서 범인이 맞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범인 식별에 점점 엄격해지는 법원

김씨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머리 스타일이나 얼굴 모습이 범인과 안 닮았는데···.” 경찰관은 김씨에게 “A씨는 동종 전과가 있고, 자동차를 터는 데 쓰인 쇠꼬챙이를 경찰이 집에서 찾아냈다”고 일러줬다. 다시 식별실에 들어간 김씨는 “자세히 보니 웃을 때 입 모양이 범인의 입 모양과 비슷하다. 범인이 맞다”고 했다. A씨는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당시 20~30분 눈을 붙였다가 다시 택시를 몰았을 뿐 김씨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난달 10일 청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오준근 부장판사)는 강도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목격자에게 용의자 한 사람만 보여주고 범인 여부를 확인토록 한 데다 A씨가 범인일 가능성을 암시한 다음 2차 범인 식별 절차를 실시했다”며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목격자 김씨의 진술은 믿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보여주는 라인업(line up·복수 면접)으로 진행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대법원 역시 같은 입장이다. 지난달 23일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가정집에 침입해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63)씨 사건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청주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B양(8)이 김씨를 포함한 3명 중에서 범인을 골라내도록 했다. 라인업의 형식은 갖춘 셈. 문제는 이 식별 절차 직전에 김씨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동영상을 B양에게 보여줬다는 데 있다.

부산고법이 1심을 뒤집고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B양이 성폭력 우범자 47명의 사진 가운데 김씨 사진을 보고 ‘범인과 아주 많이 닮았다’고 말해 비디오를 찍게 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대법원은 “식별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사건 당일 피해자가 ‘범인 얼굴은 검은 편’이라고 했으나 피고인의 얼굴이 검다고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법원 입장에는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오염되기 쉽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대일 면접을 모의실험해 봤더니 용의자를 잘못 지목할 확률이 40~50%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범인이 무기를 들고 있을 경우 목격자의 주의가 범인의 생김새보다 무기에 쏠린다는 ‘무기 효과’도 근거의 하나다. 법원이 제시하는 ‘적법 절차’는 크게 세 가닥이다. ^범인의 인상착의에 관한 목격자 진술을 상세히 기록한 다음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대면시켜 범인을 지목하도록 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문자와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

그러나 이 적법 절차는 수사 과정에서 무시되기 일쑤다. 경찰의 인식 부족 탓이다. 2005년 5월 경찰청은 범인 식별에 관한 지침을 일선에 내려 보냈다. 대법원이 “라인업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피의자만 목격자가 말한 머리 모양과 유사했다”며 무죄를 선고한 데 따른 것이었다.

경찰청 지침이 내려간 이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경찰관 2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주먹구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형사과 관계자는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이나 사진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려 보냈으나 막상 수사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이나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영국 등 선진국의 경우 용모나 신체 특성에 따라 분류된 들러리들의 리스트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둔다. 라인업이 필요하면 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소액의 사례금을 준다. 이처럼 적법 절차에 맞춰 라인업을 실시하려는 노력 없이는 목격자 또는 피해자의 진술이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범인을 올바로 지목했는데, 경찰의 절차 잘못 때문에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야기 한 토막. 지난 설 연휴 서울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은 24시간 편의점과 은행 ATM 창구를 중심으로 검문 활동을 했다. 모자·오토바이 헬멧을 쓰거나 마스크를 한 채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는 사람이 검문 대상이었다. CCTV 카메라를 피하기 위한 복장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유철 형사과장은 “지난해 빼앗은 카드를 이용해 현금을 인출한 강도범을 검거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은행 ATM 창구의 CCTV에 찍힌 강도범은 헬멧에 장갑은 물론 우산까지 펴들고 실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돈을 인출한 행인은 이후 경찰 조사에서 ‘우산 쓴 사람’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유 과장은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 수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증거가 목격자 진술밖에 없다면 검찰에 송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적인 원칙”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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