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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흑인 대통령 여성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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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4개 주에서 동시에 코커스(당원대회) 또는 프라이머리(예비선거)가 실시된 ‘수퍼 화요일’(2월 5일)을 앞두고 미 국무부는 한국 등 17개국 언론인을 초청했고, 그 바람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선거 현장을 직접 돌아볼 수 있었다. 현장이라고 해야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일원이었지만 미 공무원들의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 덕분에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많았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성(性)과 인종이 왜 문제냐는 것이다. 여성이면 어떻고, 흑인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였다. 캘리포니아는 유색인종 비율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주다. 백인 인구 비율은 46.7%에 불과하다. 대신 중남미 출신의 히스패닉 인구가 32.4%나 되고, 아시아계 인구도 10.8%에 이른다.

유색 인구 비율이 높기는 뉴욕주도 마찬가지다. 한글을 포함해 9개 언어로 투표용지가 인쇄되는 캘리포니아주만은 못해도 뉴욕주의 투표 안내문도 영어·스페인어·중국어·한국어 등 4개 언어로 돼 있다. ‘여기서 투표하시오’라는 한글 안내문이 투표소 곳곳에 붙어 있었다. 여성 또는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뉴요커가 많았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사람들의 말만 듣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넓고, 너무 다양한 나라가 미국이다. ‘와스프(WASP)’, 즉 기독교를 믿는 앵글로색슨 계통의 백인, 그것도 남자가 아니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도 여전히 많이 있다. 조지 W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든 보수적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 또한 엄존하고 있다.

설문조사를 통해 ‘당신은 여성이나 흑인을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가장 확실하겠지만 이런 질문은 정치적으로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 미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설사 하더라도 진솔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도 했다.

‘이번 투표에서 성 또는 인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느냐’고 간접적으로 묻었을 때는 ‘작용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압도적이다. ‘수퍼 화요일’에 실시된 미주리주 출구조사에서 인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응답은 18%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치적 온당성을 고려한 겉 다르고 속 다른 응답이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변화는 이번 미 대선의 키워드다. 부시 정권 8년의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국에 미래가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의 두 주자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선거판이 움직이고, 공화당에서도 비주류로 간주돼 온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후보 경선의 고지를 선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 속에 정권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여성이나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다. 흑인인 오바마든 여성인 힐러리든 둘 중 한 명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11월 선거에서 매케인을 중심으로 똘똘 뭉칠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매케인의 정통 보수 성향을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미 국민은 여성이나 흑인을 제44대 대통령으로 뽑아 230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해도 놀랄 일이 아님을 실감하고 온 것이 이번 취재 여행의 성과라면 성과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