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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민심과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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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농민·어부·자영업자·회사원·교사·공무원·사장·부동산중개인·운수업자…. 많게는 20년 가까운 나이차의 남자들은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웠다. 인건비와 비료값도 못 건지는 농촌의 현실, 사교육비로 죽을 맛인 자녀교육, 외환위기로 일자리를 잃었던 아픔, 중국산 저가에 밀려 문 닫을 위기에 몰린 공장 등 갖가지 사연이 쏟아졌다. 자연스레 정치 얘기도 오갔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 경제가 더 나아지고, 삶의 고단함이 덜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많았다. ‘경제 대통령’을 뽑았으니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4월 9일 치러지는 총선에 대한 관심도 컸다. “한나라당이 압승해야 새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견제가 필요하다. 집권당이 비대해지면 오만해진다”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게 민심이었다. 농촌에 살든 도시에 살든, 많이 배웠든 덜 배웠든, 돈이 많든 적든 생각은 비슷했다. 민심은 벌써 4월 총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긴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2주일 후면 새 정부가 출범한다. 정치권도 ‘총선 모드’로 전환했다. 이명박 당선인도 총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낡은 전봇대를 뽑고 새 기틀을 다지려면 의석수가 그만큼 중요해서다.

사실 이명박 당선인의 ‘오늘’을 만든 것은 서울시장 때의 업적이 결정적이었다. 기자는 2002년 5월 당시 고건 서울시장에게 “이명박 후보의 청계천 복원 공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고 시장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 후보는 시장에 당선되자마자 뚝심 있게 청계천 사업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청계천 복원 성공의 열쇠가 하나 있다. 서울시의회다.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서울시의원 102석 가운데 87석을 싹쓸이했다. 이 시장에겐 천군만마였다. 직전까지 94석 중 78석을 차지했던 민주당의 완패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자신감에 넘친 이 시장은 취임 초기 돌출행동으로 무리도 빚었다. 취임 사흘 만인 2002년 7월 3일 기자는 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이 시장이 거스 히딩크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는 공식행사 중 갑자기 아들과 사위를 불러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 다음 날에는 태풍이 코앞인데도 ‘오래전 약속’이라며 부인의 동문 모임에 특강을 갔다가 구설에 올랐다. 여론은 들끓었다. 결국 그는 사과를 해야만 했다. ‘백신’을 맞은 이 시장은 그 후 겸손해졌다. 고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서울시의회는 예산과 행정절차를 팍팍 밀어주며 이 시장의 버팀목이 됐다.

이 당선인이 이런 값진 경험을 했으니 다행이다. 총선 승리를 위해 물갈이에 나서는 것도 적절하다. 하지만 민심은 녹록지 않다. 영어 공교육 강화나 휴대전화 요금 인하, 유류세 인하 같은 갖가지 설익은 정책이 혼선을 빚자 반응이 나타났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당선인과 대통령직 인수위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감도 좋지만 과잉 의욕과 실적주의에 집착해 과속하면 국민이 피곤해질 것이라는 견제심리가 작용한 셈이다. 고향을 지키는 형들은 “겸손하게 중지를 모아 일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장이 마을을 편안하게 만들고 발전시킨다”며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모든 고향의 민심과 기대가 아닐까.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