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예수 생전에 예수를 초청한 에데사의 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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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펼쳐놓고 메소포타미아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희랍어로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인데 그 두 강은 아시다시피 티그리스강(Tigris)과 유프라테스강(Euphrates)을 지칭한다. 바그다드는 이 두 강이 가장 가깝게 오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메포소타미아는 현재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 걸쳐 있다.

우리는 예수의 활동지인 갈릴리(Galilee) 하면, 이상하게도 옛 강원도 ‘감자바위동네’와 같은 인상을 지니기 쉽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후대 초기기독교의 기술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중심의 가치관을 지닌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설화(Passion Narrative) 자체가 갈릴리 시골에서 놀던 촌사람 예수가 대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어떤 직선적 시간라인을 그리고 있고, 예수복음의 핵심인 수난이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요한복음은 이런 직선적 시간라인을 파괴하는 성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보다 리얼하게 생각해보면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본거지는 갈릴리이지 결코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매우 마이너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프닝의 배경일 뿐이다. 예루살렘성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갈릴리는 화려한 성전건물도 없는 초라한 시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지역 문명의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스라엘 문명도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도 최근 이라크전쟁의 집중 피폭지 중 하나였던 바스라 항구 근처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인 하란(Haran)평야에서 살다가 세겜, 벧엘을 거쳐 이집트로 갔다가 브엘세바에 정착한 인물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갈릴리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장성하여 예수운동을 펼쳤다.

그 갈릴리는 남쪽의 유대와는 비교적 격절된 문명지였으며 그 아이덴티티는 역사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바빌론, 소아시아문명권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더구나 예수가 태어나기 3세기 전에는 알렉산더 대제가 이 지역을 헬라화하면서 이 지역은 헬레니즘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갈릴리바다 주변에도 헬라식 폴리스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것은 페니키아, 남부 시리아, 데카폴리스(Decapolis, 성서 이름은 ‘데가볼리’인데, 갈릴리바다 동쪽으로 형성된 10개의 희랍식 폴리스도시를 말한다), 북부 팔레스타인 지중해 해안도시들과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극장, 학교, 스타디움 경기장, 목욕탕, 주랑 있는 아고라(시장) 등등의 헬라화된 도시 풍경은 갈릴리 지역의 다반사였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극장을 가거나 목욕을 엔조이하거나 하는 장면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가 비교적 토착적 하층민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지만, 예수가 산 문명의 환경과 지적 풍토는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 있어서 최첨단의 개방적 분위기였다.

갈릴리는 우선 인종적으로 복잡했으며 언어도 유대지역과는 달랐다. 따라서 이방인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북쪽의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트랜스요르단, 다마스쿠스 지역과 남쪽의 사마리아, 유대 지역의 완충지대였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예속감이 없었다. 갈릴리에는 수도도 없었고, 왕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으며, 제사장들의 하이어라키도 없었다. 예수가 살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로마 압정의 세금착취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어떤 초월신이나 왕에 대한 충성심이란 갈릴리 사람들의 덕성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소피스트들과 같은 헬라화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을 리드하고, 많은 코이노니아이(koinoniai) 소규모 친목단체들이 활약하고, 다양한 희랍철학 유파사상과 지중해문명권의 모든 신화적 사상의 홍류가 휩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라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사상운동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비옥한 하란평야 위로 유프라테스 상류지역, 지금은 터키에 속해 있지만 우르파(Urfa)라는 매력적인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예로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 지역)와 북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교통요지로서, BC 14세기 히타이트에 멸망되기 이전에는 후리안 왕조의 수도로서 독자적인 고문명의 정체성이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지니는 오스로외네왕국(Osrhone)이 되었고 그 수도가 에데사(Edessa)였는데, 현재의 우르파가 바로 에데사인 것이다.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50년까지 에데사를 다스린 왕이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였는데, 그의 통치기간이 예수의 생애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브가르왕과 예수의 관계에 대하여 최초의 기독교 교회사가인 비숍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ia,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는 그의 유명한 『교회사』(The Ecclesiastical History, AD 312~324 집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의 기적을 듣게 된 아브가르왕은 예수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왕은 예수에게 자신의 고향을 안전한 거처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자기를 간절히 소망한 아브가르왕의 믿음을 축복하였으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왕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아브가르왕은 다시 편지를 보낸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에데사로 와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고쳐줄 것을 편지로 간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가 7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에데사로 보내 아브가르왕과 많은 백성들을 고친 후, 모든 거주민들에게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소기천, 『예수말씀복음서 Q개론』 참고).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인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야기들로부터 우리는 역사적 정황을 어떻게 추론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비록 픽션 같은 야사일지라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에데사야말로 인류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기독교국가(the earliest Christian state)라는 사실이다. 2세기 말부터는 에데사의 왕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에데사왕국이야말로 시리아어로 된 초기기독교 문헌의 생산지였던 것이다. 여기 유세비우스의 기록 중에 중요한 사실은 ‘도마라고 불리는 유다’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 작가 아루노비우스가 저술한 『이방민족사』(Adversus Gentes)에 의하면 도마는 직접 에데사로 갔다.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참고). 그는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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