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6> 마오쩌둥의 '영어 교사' 장한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호 34면

1995년 스자후퉁의 자택 거실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는 장한즈(왼쪽). 김명호 제공

1963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70회 생일잔치는 조촐했다. 몇 명의 친척과 장스자오(章士釗) 등 네 명의 동향 노인을 초청한 게 전부였다. 마오는 이들에게 자녀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라고 사전에 통보했다. 부인은 절대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 장스자오는 영어교사를 하던 장한즈(章含之)를 데리고 참석했다. 장한즈는 28년 전 상하이에서 외박하고 귀가하던 장스자오가 새벽에 안고 들어온 딸이었다.

마오는 장한즈가 베이징외국어학원 영어교사인 것을 알자 갑자기 영어를 배우겠다고 했다. 춘절(음력 설)이 지나자 장한즈는 매주 한 번 마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았다.

문화혁명 초기에 외교관 양성기관인 외국어학원은 천이(陳毅)·시펑페이(姬鵬飛)·차오관화(喬冠華)의 타도를 주장하는 조반파와 이들을 보호하려는 반대파 간의 투쟁이 치열했다. 장한즈는 반대파에 속했다. 67년 봄 장한즈는 동네 문방구에 물건을 사러 갔다. 시답지 않은 문구를 고르던 중 키가 크고 삐쩍 마른 사람이 들어와 종이를 몇 장 사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근엄한 모습에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가 나가자 점원들이 장에게 물었다. “너, 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몰라.” “조반파들이 때려잡으려고 하는 차오관화야.” 장은 이날 차오에게서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고 훗날 말했다.

71년 이른 봄, 장한즈는 마오의 주선으로 외교부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4층이었다. 하루는 어떤 키 큰 사람이 장의 앞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걸음이 너무 느렸다. 장이 급히 추월하려고 했다. 뒤에 오던 사람이 팔을 잡았다. “뛰지마. 앞에 차오 부장이 가잖아.” “어떤 차오 부장?” “외교부에 차오 부장이 또 있어?” 그러면서 “얼마 전에 부인 궁펑(澎)이 죽었어. 건강이 엉망이래. 차오 부장이 지나갈 적에 아무도 추월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야”라고 나지막하게 말해줬다. 초대 외교부 대변인인 궁펑은 제네바 회담에 대표로 참석한 중국의 1세대 외교관이었다. 남편에게 외교관의 자질이 있다고 저우언라이에게 차오관화를 처음 추천한 것도 궁펑이었다.

키신저와 닉슨이 연이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중·미관계의 해빙이 본격화됐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했고 대표단을 파견했다. 차오관화가 단장이고 장한즈는 통역이었다.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마오가 이들을 접견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장한즈를 향해 “너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너와 네 남편은 이미 부부가 아니다. 왜 체면 때문에 남들이 알 것을 두려워하느냐? 자신을 해방시켜라. 그러면 내가 제일 먼저 축하해 주겠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시 장한즈는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체면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풍류 인물이었다.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미국을 오가며 차오관화와 장한즈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귀국했을 때 장한즈는 이혼수속을 밟았다. 소식을 들은 마오는 약속을 지켰다. 한밤중에 선물을 보내 축하해 주었다. 마오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김일성이 보낸 황주 사과였다. 다음날 눈이 내렸다. 차오관화는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눈을 가리키며 온종일 싱글벙글해 사람들을 민망하게 했다.

장한즈와 결혼한 차오관화에게 마오는 “장한즈에게 장가갔으니 장한즈의 집에 가서 살면 되겠구나”라고 했다. 차오관화는 죽는 날까지 장스자오가 물려준 장한즈의 집에서 살았다. 스자후퉁(史家胡同)의 품위 있는 사합원이었다.

중국 외교계의 꽃, 사상가이며 변호사인 장스자오의 입양 딸, 마오쩌둥의 영어교사, 외교부장 차오관화의 부인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장한즈의 사망 소식이 며칠 전 보도됐다. 외동딸이 빈소를 지킨다는 소식이다. 장한즈는 한동안 영화감독 천카이거(陳凱歌)의 장모이기도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