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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끝나는 곳에 한국 연극의 희망이…안치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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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14면

자신의 글은 피로 쓰여졌다고, 글이란 모름지기 피로 써야만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비록 나는 흡혈귀가 아니지만, 진정 피로 쓴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 저자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지만, 특히 연극평론가 안치운 선생의 책들을 좋아한다. 지난달에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여러 신문과 잡지에 썼던 연극 공연평을 모은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2007)을 출간했다.

장정일이 만난 작가 - 연극평론가 안치운

내가 처음으로 읽은 저자의 책은 청하에서 초간(1992)되고, 예니에서 재간된 『추송웅 연구』(1995)다. 선생을 만나러 나서기 전에, 그 책을 읽고 뭐라고 써놓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장정일의 독서일기·3』(범우사·1997)을 꺼내 봤다. 아마 나는 이 책을 서울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갈 때 읽을 양으로 샀던 모양이다.

그 독서일기엔 아주 짧게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기차 속에서 안치운의 『추송웅 연구』를 읽다. 이렇게 열정적인 글을 언제 접했던가? 책을 든 사람의 손을 불태울 듯하다. 이 책은 추송웅에 관한 평전이면서, 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또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제도에 대해 말한다. 내면연기·연극평론·연기자와 사회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관점 이상의 쟁점이다. 한번 더 읽고 싶다”고 적혀 있다.

그 일기를 썼던 때는 1996년 6월 28일. 강산도 속절없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흘려 보내고, 저자와 만났다. 제일 궁금해서 먼저 물었던 것은 『추송웅 연구』에서 최초로 제기된 ‘내면 연기’에 대한 논쟁이 어떻게 마감되었는지였다. 약간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연극비평이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고 설명하는 언어는 굉장히 빈약하다.

그저 내면 연기가 좋았느니 나빴느니 하는 게 비평가들이 배우의 연기를 가늠하는 만능의 잣대이자, 배우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저자에 따르면 연극이란 우선 몸의 예술이며, 배우야말로 연극 예술을 온전히 떠맡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내면 연기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연기론은 배우의 몸을 멸시하고 연극 예술 자체를 왜곡시킨다.

흥미진진한 답변을 기대했으나, 기대했던 논쟁의 전말기는 들을 수 없었다. ‘내면 연기란 허구다!’라는 도전적인 문제제기는 기존 연극 평론가들의 허위의식과 직무유기를 꼬집는, 그래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파천황적인 이의제기임이 분명했으나, 논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논쟁 부재가 새삼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추송웅 연구』에서 제기했던 ‘내면 연기 허구론’을 새로운 평론집을 낼 때마다 조금씩 다듬었고, 두 번째 평론집 『연극제도와 연극읽기』(문학과지성사·1996)에서 완전히 업그레이드했다.

“외국 공연 단체를 만날 때마다 ‘당신들도 내면 연기를 하느냐’고 물어봤지만, 도리어 ‘내면 연기가 뭐냐’고 내게 묻더군요. 연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 자신의 몸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모호한 내면 연기가 유일하고 최상의 연기인 듯 얘기되는 데는, 연극을 문학의 하위 장르로 보거나 몸을 영혼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태도와 상관있죠.

그런 걸 플라톤적인 사고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좀 더 중층적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극(新劇)이 들어오면서 신극 이전의 전통 연희는 천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강등되고, 그와 반대로 신극은 정신적인 무엇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신극을 받아들이면서 연극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깊이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래야 신극을 엘리트 예술로 내세울 수 있고, 자신들을 엘리트로 치장할 수 있는 거죠.”

내면 연기란 말하자면 서양의 인문적 교양을 먼저 선취한 자들의 권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문학적 연극’이랄 수는 있지만, ‘연극적 연극’은 되지 못한다. 내면 연기를 내세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한국 연극은 미학적인 면으로나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연기술에서 낙후했다.

이 논리의 요점은, 한국의 근대 연극이 연극으로 홀로서기하지 못하고 문학이나 인문학적 교양의 들러리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연극이 상업화되다 못해 오락거리로 전락한 지금, 연극이 대학생 관객들이나 OL(오피스 레이디)들의 ‘필수 교양’이던 때가 오히려 그립기조차 하다.

“진지한 연극이 퇴색하는 시대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연극예술이 진지해질 수 없는 시대, 연극이 놀고 있는 시대, 연극예술이 별 볼일 없는 시대라고 해야 할 테죠. 연극이 연극을 고민해야 하는 절박한 시대에 고민보다 더 빨리 연극 예술이 변두리화되고 있고, 그 변두리에서 연극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갑니다.

연극이 삶과 함께 가지 못하고 저 혼자 놀고 있는 시대는 연극만 불행한 시대가 아니라 전망이 안 보이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연극과 사회는 동형 구조고, 연극 예술의 변형이나 발전과 사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시대에 대항하지도 못하고, 이 세계를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연극은 세상과 한통속이 저절로 됩니다.”

한때 서울에 살다가 대구로 낙향했다. KTX가 없던 때, 단지 한 편의 연극을 보기 위해 3시간40분이나 걸리는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을 들락날락했다. 프랑스 파리도 11시간이면 가는데, 분통이 터졌다. 그러다가 근 9여 년 만에 서울에 새로 집을 구한 지 3년째다.

서울로 올라올 때 했던 결심 가운데 하나는, 부지런히 대학로를 출입하는 거였다. 낙향하기 전에는 늘 대학로를 배회하며 낮 공연과 밤 공연 합해 하루 ‘두 탕씩’ 연극을 관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희망사항과 달리 지금까지 고작 3편을 관람했다. 그냥 한번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대학로는 9여 년 전과 많이 달랐다. 벽보판에 붙은 여덟 개의 포스터 가운데 일곱 개가 뮤지컬이었다. 그 가운데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도 있었는데, 아, 이게 어떻게 뮤지컬로 된다는 말인가!

“연극의 위기에 연극 시장의 한복판을 차고 들어온 게 뮤지컬입니다.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뜨는 패스트푸드처럼 노래와 춤으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뮤지컬은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하고자 하는 비정상적인 자본주의 욕망에 의해 추동됩니다. 뮤지컬이 빠른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뮤지컬을 빠르게 하는 거죠.

뮤지컬은 자본과 크게 연관되어 있고, 장르 자체가 미국식이죠. 한국 연극계는 아직 연극을 산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뮤지컬 공연이 커지고 뮤지컬 수입과 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공연예술계에 산업이란 용어가 조금씩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국 연극은 산업이기에는 아직 크기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연극을 산업이라고 일컫는 것을 마다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고비에 와 있습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괜히 놀라서 내가 움찔거리게 되는 대목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예를 들어 “상업성과 스타 근성에 물든 한국 부르주아 연극은 졸렬함과 천박함으로 타락해 있다”거나 “이제부터 연극 동네라고 하지 말고 연극 시장이라고 하자” 또는 “언제 우리나라의 현대 연극이 고급이었던 적이 있었단 말인가?” 같은 구절이 그렇다.

그런데 연극의 통속성과 상업주의를 질타하는 무수한 구절들 한쪽에 낮은 목소리로 되새기는 “저자가 글을 쓰면서 지닌 또 하나의 고통은 연극의 고민을 쓰면 쓸수록 연극에 대한 나의 패러다임이 형편없이 고루하다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같은 구절은 나를 슬프게 한다. 자,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까지 쓴 선생의 저작은 한국 연극에 대한 묵시록인가?

“피상적으로 보면 비관적으로 보이겠지만, 내 글은 희망과 절망을 구분하고, 그것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연극은 이렇게 글로 쓸 수 있고, 연극에 대한 글은 이렇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으로 보면 좋겠네요. 또 내가 주로 한국 연극을 비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글로써 하고 싶은 것은 ‘연극이여, 이제부터 철학을 주문처럼 외우자. 삶과 연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그것이 한국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사방팔방 열려 있습니다. 연극하는 철학의 길, 연극을 사유하는 철학의 길은 오늘날 연극의 길 끝에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과 산을 오르는 길이 있는 것처럼. 연극과 그것을 공부하는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지요.” 사진 신인섭 기자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이자 독서광으로서 지난해 연재하다 중단했던 행복한 책읽기의 비밀을 올해 이어 파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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