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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부모가 보낸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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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목화 솜털 같은 눈이 부소산을 소담스럽게 감싸던 날, 2000년 역사의 영화를 강물에 깊이 간직한 백마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꽃꿩이 숨어 있는 백사장 갈대숲은 눈의 무게가 버거웠는지 느린 장단에 춤을 추는 노무(老巫)의 춤사위처럼 흐느적거렸다. 꽃보라처럼 윤무하는 눈송이가 강물에 내려앉는 것을 보면서 꽃다운 나이의 궁녀들이 왕의 실정으로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흩어졌던 슬픈 역사가 떠올랐다.

역사 문화의 생채기가 켜켜이 설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조국이다. 힘이 모자라 만주 땅도 빼앗기고, 북한 땅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한많은 민족이다. 걸핏하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도전을 받기도 하는, 분명 우리는 슬픈 민족이다.

눈 내리는 청아한 아침,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학부모의 육필 서신이 내 앞에 놓였다. '총장님께 드립니다'로 시작한 이 편지는 발신인이 '대구에서 예비 학부모'로만 돼 있었다.

"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전통문화학교에 지원해 합격하여 입학을 앞두고 있는 여식을 둔 아비입니다.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야 하는 딸자식을 보자니 설렘과 근심이 뒤섞이는 심정을 이해하시겠지요. …중략… 면접하던 날 처음 본 캠퍼스는 그림처럼 아담했습니다. 4년간 학문만 닦을 도량으로 제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은 이후에도 가까운 대학에 지원하라고 누차 설득하기도 했었지만 원서를 내기는커녕 말조차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딸을 보고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서 그 먼 학교에 가려고 했나, 뭐 그런 식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저나 제 아내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입학하게 되면 총장님의 대학에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이 될 것 같습니다. 좀 일찍 시집보낸다고 여기면 되겠죠. 남매 중 첫째인데 꿈은 엄청 크답니다. 더군다나 총장님께 보내니 4년간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제는 대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될 것이고, 저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을 한번 더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총장님과 교직원 여러분 모두 행운이 함께하시길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얼마나 신뢰와 사랑이 묻어나는 편지인가. 나는 편지를 읽으며 바람처럼 날리는 고뇌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랑은 믿음이고, 삶을 희망으로 이끄는 오솔길이다. 과연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학부모가 보내주는 신뢰를 부끄러움 없이 받을 만한 인간이며, 그 값을 하기에 충분한 교육자이고 경영자인가. 문화재 학문의 깊이도, 대학경영의 전문성도 적고, 교육자로서의 인격과 품성 등 최소한의 준비도 덜된 상태다. 게다가 학교는 전통과 역사가 일천하여 훈장.학동.총장 할 것 없이 제 변명만 앞세운다. 마치 어긋난 사물놀이처럼 불협화음이 요란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한 꿈이 있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희망을 껴안고 가죽같이 질긴 실천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겠다. 그러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탄하고 충실하게 가르쳐서 반드시 훌륭한 문화재 일꾼을 길러내 사랑과 믿음을 보내준 학부모께 보답하겠다는 각오가 샘솟았다.

마치 세상과 담을 쌓은 듯 외진 곳에서 4년을 보내야 하는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달픈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 해도 학부모의 마음으로 '교육 백년 문화 천년'의 정신으로 손에 옹이가 박힌 장인들을 키워내는 데 있는 힘을 다하겠다. 우리의 눈물.땀.기술.지식.지혜를 총합해 가장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든다면 교육과 취업의 무한경쟁시대가 어찌 두려우랴.

이종철 전통문화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