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기업 규제와 정치자금의 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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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관료들은 대체로 무언가 금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각종 규정들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요건들, 바꿔 말하면 무언가 안 되는 이유를 군데군데 포진해 놓았다. 적색 테이프(red tape), 즉 규제 조항들이다. 이런 규제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때로는 법률에서, 때로는 시행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조항이 관료들에 의해 쉽게 도입이 가능한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법률이 가진 문제점에 있다. 많은 법률이 골격만 갖춰진 가건물같이 만들어진다. 중요한 부분에 가면 대부분 하위 규정에서 정한다는 조항이 많다. 법률 제정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일단 통과되고 나서 만들어지는 하위 규정은 관료들의 몫이다. 이러니 관료들이 만든 법에서 중요 권한이 하위 규정에 위임되는 것은 행정 편의를 위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곳곳에 규제 조항들이 포진하고 이를 활용해 각종 인허가를 좌지우지하면서 관료들은 자신의 재량권을 극대화한다.

정치권은 어떤가. 평소에는 자신이 할 일(입법)을 상당 부분 행정부에 미룬 채 관료들이 권한을 극대화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 모든 조항이 투명한 상태에서 법이 통과되면 상대적으로 법 집행도 투명해질 것인데, 국회의원들은 일을 게을리해서 관료들의 재량권이 극대화되는 것을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료를 통한 자신들의 간접적 재량권을 만든다. 그리고 국정감사나 인사청탁 등을 통해 관료들을 움직이면 안 된다던 일도 해결된다. 관료들의 힘이 셀수록 정치권의 힘도 막강해진다. 정치권과 행정부 간에 미묘한 욕망의 이중적 일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진출하고, 공장을 증설하고, 투자를 확대하려면 항상 부닥치는 것이 도처에 깔린 규제들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규제가 풀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린다. 기다려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관료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정치권을 이용한 간접적 접근이다. 항상 돈에 목말라하는 이들 정치권을 통해 걸림돌을 제거하면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투자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결국 기업들은 이 편한 게임의 룰에 스스로 적응해간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음습한 정치자금의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최근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 과정에서 돈을 받은 정치권, 돈을 준 기업들이 모두 몰매를 맞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태계의 논리에서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관료들은 규제 조항을 계속 생산해내면서 힘을 발휘하고, 정치권은 기업에 규제 철폐를 약속하며 유혹하다가 머뭇거리면 위협까지 하고, 결국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기업들은 자금을 제공하며 생태계의 일원이 돼버린 것이다.

중요한 과제는 이런 불법 정치자금을 둘러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행정이 투명해지고 규제가 완화되고, 되고 안 되는 이유가 미리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나아가 국회가 제 기능을 하면서 의원 입법이 많아지고, 중요 조항이 하위 규정에 위임되지 않으면 공무원들의 재량권이 줄어든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정치자금의 생태계는 자연히 파괴된다. 주고받을 일이 줄어 궁극적으로는 없어질 것이다.

최근의 관심사 중 하나는 정치자금을 제공하다 걸려든 기업에 대한 처리 문제다. 당연히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바닥을 기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대통령조차 스스로 피고석에 앉아 있다고 실토하는 마당에,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정치자금의 거대한 생태계를 그대로 두고 몇몇 기업인만을 선별적으로 사법처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바람이 혹독하게 불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부여잡고 버틴다. 그러나 햇볕을 쬐어 온도를 올리면 나그네는 알아서 외투를 벗는다. 이솝 우화의 지혜다. 이제 손가락질을 그만두고 정치자금의 생태계 파괴를 위한 햇볕정책을 실시할 때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경영무역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