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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보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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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에선 노인 문제를 소홀히 다루는 정치인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회색 파워(gray power)란 말까지 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승부를 법정으로 끌고 간 플로리다주의 선거 결과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조지 W 부시 후보가 동생이 주지사인 플로리다에서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예측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고령자를 위한 의료보험의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노인 비중이 가장 큰 플로리다에서 이 공약이 먹혀들어 접전을 벌일 수 있었다. 50세 이상의 은퇴자 3000만명이 가입해 있는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단체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인구 보너스 단계에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다르다. 인구 보너스 단계란 생산연령층이 많고, 어린이와 고령자에 대한 부담은 적어 고도 경제성장이 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인구학적 용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와 7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의 비중이 가장 크고 다음 세대의 인구는 저출산으로 급격히 줄고 있다. 그러나 인구 보너스의 이점을 얼마 누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얼마 전 고령사회포럼에서 김태헌(한국교원대)교수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나 '사오정(45세가 정년)' 현상을 베이비 붐 세대와 연결지어 해석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상황에서 경기가 가라앉다 보니 이들의 바로 앞 세대인 45세 이상이 직장에서 퇴출되고, 뒷세대인 20대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베이비 붐 세대가 고령화하면 사회 구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정년 연장이 노인의 보호대책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노동 인구가 줄어드는 10~20년 뒤엔 노인을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정년을 연장해야 할 상황이다.

노인당이 출현하는 등 정치에서 회색 파워가 강력해질 수 있다. 고령화 등 인구 문제는 적어도 20여년 전부터 대책을 마련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인구 보너스가 핵폭탄으로 돌변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세정 논설위원